[시애틀 수필-염미숙] 메모리얼 벤치

염미숙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메모리얼 벤치


잠시 쉬어가려 벤치에 앉았다. 캠퍼스는 속속들이 초록이다. 퍼붓는 오월 햇살이 눈이 닿는 모든 것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학생들이 여러 방향에서 나타나 각자의 선을 그으며 사라진다. 선들은 너른 잔디밭 위에 여러 모양의 도형을 그려 넣는다. 


“세상의 모든 진리를 향한 호기심으로 가득 찼던 그녀를 그리며.”

벤치 등받이에 새겨진 문구를 읽는다. 그녀는 하나의 문장으로 남아 있다. 남겨진 이들은 이 문장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고심했을까. 그녀가 내게 말을 건다면 어떤 말을 할까. 몇 안 되는 단어를 퍼즐로 삼아 나는 그녀의 모습, 언어와 성품을 상상해 본다. 아직 이 땅에 선을 그리고 있는 내가 그녀와 대화라도 나눈 듯, 벤치에서 일어섰을 때 나만의 비밀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낚시하러 가셨다(Gone for fishing).”

몇 걸음 걷다가 지난 해 낚시터에서 읽은 문구를 떠올린다. 낚시터로 애용되는 방파제 근처에 그 벤치가 있었다. 아마도 그곳이 고인이 자주 찾던 장소가 아니었을까. 돌로 만들어진 우직한 그 벤치는 소금기 섞인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내려도 마냥 일렁이는 바다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는 수평선 너머로 낚시를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가셨다(Gone). 그 바꿀 수 없는 완료의 선언이 엄숙하게 귀에 울렸다.


“1915년 졸업생 일동”

광장(Red Square)으로 향하는 길, 저만치 이끼에 덮인 벤치가 눈에 띈다. 비바람이 돌마저 깎아버린 걸까. 새겨진 연도가 희미해서 한참 들여다보았다. 긴 세월 동안 캠퍼스의 벚나무들이 고목이 되어가고 새 건물이 들어서고 컴퓨터 전공이 생기고 학생 수가 늘었다. 지금 그들 모두는 이 땅에 없지만, 그들이 남긴 벤치는 1915라는 청춘을 100년이 넘게 품고 있다. 타박타박 걷다가 자꾸 뒤돌아본다. 아직 이곳에 남아있는 그들의 청춘을.


“사랑받는 아들, 형제, 친구. 하늘에서 다시 만나요.”

로디가 흐드러지게 핀 광장을 지나 계단을 내려오다가 오른편에 놓인 벤치를 보았다. 새겨진 이름은 낯익은 성, 김(Kim)이다. 아직 낡지 않은 새 벤치다. 그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의 떠남은 급작스러웠고 불과 몇 해 전의 일이었다. 24살 젊은 나이에 떠난 그를 그리며 친구들이 마련한 벤치다. 보낸 이들은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언젠가 다시 만나길 바란다. 인사치레도, 폼 나게 이별하자는 말도 아니다. 다시 보자는 그 말은 슬픔을 덮는 소망이다.


주립대학 캠퍼스는 늘 젊음의 생기가 분출하는 곳이다. 젊음이 눈을 가렸을까. 오롯이 놓인 메모리얼벤치들을 분명 두 눈으로 보았지만, 늘 무심히 지나쳤다. 오늘 하나의 벤치를 만나고 나니 배턴을 넘기듯 벤치들은 또 다른 누군가를 연이어 소개한다. 어느새 캠퍼스는 먼저 떠난 이들로 가득하다. 그들도 오늘 나와 마주친 학생들처럼 허락된 시간 안에 자기만의 선을 그리며 지나갔을 테지. 미래의 언젠가 아직 오지 않은 세대가 내가 그린 선을 이렇게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도 있으리. 오월 한낮, 초록이 넘실대는 항아리 안에 삶과 죽음이 바특하게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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