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안문자」 생일에 피는 꽃
- 24-03-04
안문자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생일에 피는 꽃
생일이 돌아온다. 친구들의 카드에는 ‘꽃피고 새우는 계절에 태어났네’ 로 축하한다. 그렇다. 나는 새 생명이 움트고 꽃 피우는 계절에 태어났다.
내가 자랄 때는 생일이 언제인지 모르고 지나갔다. 그 시절은 아마 다 그랬을 거다. 부모님의 생신도 모르고 지날 때가 많았다. 형제들이 어른이 되어서야 아버지 어머니의 생신을 챙겨드렸다. 아이들이 자랄 땐 그들을 즐겁게 하려고 풍선을 띄우고 꽃을 달아주며 파티를 열어주었다.
부모님을 중심으로 가족들이 시애틀에 모여 살게 되었을 땐 더 기다려지던 생일이다. 한 달에 한 번 그달의 생일잔치를 한꺼번에 했으니까. 매달 가족 모임을 한 셈이다. 참으로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세월은 흘러 부모님은 하늘나라에 가시고 아이들은 어른들이 되어 멀리서 저마다의 삶을 가꾸고 있으니 신났던 생일 놀이는 추억으로만 남았다.
어머니는 가족들의 생일이 돌아오면 손자 손녀, 아들과 딸, 며느리와 사위들에게 많지는 않지만 똑같은 금액의 돈을 꼬부랑글씨가 가득한 카드에 담아주셨다. 크리스마스 선물도 세뱃돈도 똑같은 금액이다. 이젠 사랑이 담긴 따끈따끈한 지폐의 촉감이 사라진지 오래다. 지금도 카드 진열장 앞에서면 어머니를 위한 카드들을 구경 하곤 한다. 어머니가 계셨다면 이 카드가 좋겠구나, 어머니의 생신이나 어머니날 등 기념일마다 딸들과 며느리들은 꽃이 있는 화려한 카드를 드리곤 했는데....
울컥,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의 선물이 없어서뿐이 아니다. 나를 낳아주신 엄마를 다신 볼 수 없다는 슬픔이 되살아난다. 글쓰기를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봄이다. 내 생일은 봄에 얹혀 온다. 서서히 내 가슴에 잔잔한 설렘이 물결친다. 3월의 생일 석은 ‘아쿠아마린’. 옅은 하늘색으로 유리같이 맑은 보석이다. 남편에게 하늘색 반지를 사 달라 할까? 아니면 뭘 갖고 싶지? 3월 중순, 매화꽃은 이미 피었고 복수초도 피었으려나? 뒷마당의 사과 꽃도 물기어린 아침을 눈부시게 하겠지.
소노 아야코는 중년 이후가 진정한 인생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더욱 삶의 깊이를 되씹는 노년은 말할 것도 없을 터다. 나는 평생 즐겁게, 의미 있게 살아보려고 노력했다. 땅위에 살아있는 감사. 선하고 순수한 인간관계 속에서 나누었던 사랑의 기쁨! 생일은 그 자체가 이미 선물이다. ‘나’ 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삶을 시작하게 해준 고마운 날, 더 이상 무슨 선물이 필요한가?
지나간 시간들의 켜켜이 쌓인 궤적을 따라가 본다. 가족이 있어 감사함은 말해 무엇 하리. 멀리 있는 아이들과 조카들은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건강하게 지낸다는 소식이 오간다. 가까이엔 형제들이 있다. 이름만 떠올려도 보고 싶은 친구들이 있다. 존경하는 분과 사랑도 드리고 받는다. 깊은 친교로 인생을 나누는 크리스쳔도 있네. 다행이 욕심이 없는 나는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고 무엇이나 좋은 면만 생각하는 편이다.
창조주의 놀라운 솜씨를 감탄한다. 품위 있고 고상한 인격의 사람들을 알아보는 눈도 있다. 꽃을 무조건 좋아하고 예쁜 것들을 아끼고 좋아한다.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것, 얼마나 행복한가. 글을 쓰는 일은 더더욱 감사한 일이다. 그렇지, 안 씨네 크리스마스 음악회는 26회까지 이어졌다. 이 모두는 무상으로 받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내 인생은 엄청난 선물로 포장된다. 넘치게 받은 선물이다.
아, 침묵 속에 다가온 깨달음이 나를 압도한다. 나, 안문자는 하나님께 받은 최초의 선물임을. 태어난 기쁨의 충격을 이제야 절실히 깨닫다니. 오늘까지 나의 인생을 살게 하신, 나의 모든 것. 고비고비마다, 순간순간마다 인도하시고 큰 손으로 보호해주신 기적들.
어느 수필가의 말처럼 “내 나이를 세어 무엇 하리.” 나는 지금 황혼의 어디쯤 서있다.
삶의 기쁨과 인생의 슬픔과 고뇌도 글로 승화시킨다. 남편과 함께 이어온, 아이들과 같이 걸어온 기적의 삶이 투명하게 뜬다.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 (잠언 30장 8절)의 기도를 들어 주신 우리의 주인께 감사만 남았다. 더 이상일 수 없는 삶의 충만감. 창밖은 연둣빛 물로 고요히 잠겨있다.
잔잔한 파도처럼 튜립, 수선화, 개나리, 목련, 벚꽃… 3월의 꽃잎들이 춤을 추고 내 가슴에는 셀 수 없는 감사의 꽃들이 향기를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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