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박보라] 땅속에서 맞잡은 손
- 24-01-08
박보라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땅속에서 맞잡은 손
늘 다니는 산책길이 있다. 집에서 출발해 아주 작은 오솔길을 지나 큰 건물을 돌아오는 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차장을 따라 길게 이어진 잔디밭을 도는 것이다. 세련되게 잘 지어 놓은 그 건물은 항공 회사 보잉의 디자이너 사무실이다. 거기선 태평양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저 멋진 풍광을 보며 일한다니 참 좋은 근무환경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기업 복지가 아니겠는가. 부럽다 못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렇게 멋진 건물 주차장 입구엔 여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주 낡은 나무 표지판이 하나 서 있다. 그것은 오랫동안 아무도 관리를 해주지 않아서 누구의 시선도 끌지 못한다. 같은 이유로 나 역시 늘 그냥 지나치다가 괜한 호기심에 자세히 읽어보니, 그 자리가 아메리칸 원주민들과 백인들이 회의했던 자리라는 안내판이었다. 어느 쪽이 더 유리한 칼을 쥐었을지 말하지 않아도 알만한 불공정 거래, 주인 없던 땅이 주인 아닌 주인을 갖게 된 시간의 한 모퉁이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아무 생각 없이 그 땅을 밟고 또 밟는다.
주차장을 둘러 키도, 덩치도 고만고만한 나무들이 열 맞춰 서 있다. 같은 시기에 이 땅으로 이사 온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너른 잔디밭 위로 그들과 비교되는 서너 그루의 큰 나무가 있다. 건너편 생태 보호 구역에 갇힌 나무들과 생김새가 비슷하다. 그건 아마도 원래부터 그들이 함께 있었단 증거고, 그 자리에 사람들이 길을 깔고, 집을 짓고, 건물을 올렸단 뜻일 터. 다시 말해, 그 나무 서너 그루와 생태 보호 구역의 나무들은 원래 한 무리를 이루었을 것이고, 그들 사이에 있던 나무들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무자비하게 잘려져 나갔단 뜻이다.
그중 한 나무 아래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울창해진 나뭇잎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새어 들어왔다. 손을 뻗어 격투기 선수의 등판 같은 기둥을 만져봤다. 수백 년 동안 흘린 피고름이 가피를 만든 듯, 거친 나무껍질이 울퉁불퉁하다. 이 상처의 흔적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무엇이 그들에게 이런 상처를 낸 것일까.
인간 세상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다. 삼풍 백화점과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세계 무역센터 빌딩이 테러당했을 때,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곁에서 보며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잠시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 뿐 공포와 슬픔, 악몽으로 마음속에 가피가 생기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볼 수 없는 그 상처에서 내내 피고름이 흘러내렸다. 어쩌면 그 상처는 그들의 기억 속에 깊이 뿌리 박고 있을지도 모른다. 때론 차라리 그때 죽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그들 대신 내가 죽었더라면 더 나았을 뻔했다며 큰 고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식물도 통증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자신의 잎사귀를 벌레가 갉아 먹을 때 반응한다는 것. 그 말이 떠올라 무심코 뿌리가 박혀있는 땅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 그 안에서 그들의 뿌리는 아직도 서로 뒤엉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잘리고 뽑혀 나가던 다른 나무들의 고통을 서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뿌리를 손처럼 맞잡고 공포의 시간을 함께 겪었을 테고, 아프다고 울부짖는 다른 나무들을 돕지도, 구하지도 못한 채 신께 선택받은 자처럼 단 몇 그루만이 살아남았을 테다.
이 땅은 원래 갯벌이었다. 그때는 아무도 이 땅의 주인이 아니었다. 아메리칸 원주민들은 이곳에서 연어를 잡고, 산딸기를 따고, 나무 사이사이를 뛰어다녔다. 하지만 이제 이 땅에서 아메리칸 원주민들은 볼 수 없다.
이 땅의 슬픈 기억을 기억하는 나무들은 시간을 먹고 자라 어느새 나뭇잎 무성한 거목이 되었다. 아무도 쳐다봐 주지 않는 아주 작은 나무 표지판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땅의 상처를 마음에 품은 채 고요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저 드넓은 바다는 그들을 위해 시원한 바람을 뭍으로 밀어내고 있다. 나무의 가피가 떨어지고 새 살이 돋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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