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소설-박보라] 천국까지 10cm
- 24-01-05
박보라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천국까지 10cm
“암 입니다.”
의사의 입술이 건조하게 달싹였다. 그는 썩 불편한 기색도 없이 군더더기 하나 없는 그 말을 던지곤,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빼곡히 적힌 종이 더미를 그냥 덮어 버렸다. 난 이런 장면이 싫어서 드라마도 보지 않는다. 그 무료한 대사는 얼마나 성의 없는지. 한 사람의 생명에 대해 이보다 더 간단할 수 없는 명료한 말로 단정 짓고 그 말에 한없이 무책임하지 않던가.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지구라는 행성에서 암이 정복되어 가는 중이라고 했다. 분명 그런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이제 더는 암으로 인류가 생명을 제물 삼을 일이 없을 거라고. 인공 장기, 이종 장기의 시대가 열려 휴대전화를 바꾸듯 장기를 손쉽게 바꿀 날이 올 거라고 하지 않았나. 결국 난 신인류가 누릴 이러한 놀라운 혜택들, 그것들이 거의 다 도착한 길목에서 내 생을 흙 속에 덮어야 한단 말인가. 억울한 심정은 심장에서부터 끓어올라 무언가에 짓눌린 목구멍을 비집고 반항하듯 튀어나왔다.
“왜? 대체 무엇이 문제인 거요!”
의사는 이런 일에 익숙하다는 듯, 손가락을 깍지껴 잡고 기우뚱한 사무용 의자에 등을 붙이며 답했다.
“조금만 일찍 오지 그러셨습니까. 현대 의학으로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 다른 장기로 다 전이되어서... 늦었습니다.”
빨리 오지 그랬냐는 의사의 타박 섞인 물음이 감정의 실종으로 인해 평서문처럼 들렸다. 몸 안에서 굵은 현 하나가 퉁 하고 끊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울림은 한동안 온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두근거리게 했다.
한 달 전부터 뭘 먹어도 얹힌 듯 불편하다고 했더니 바빠서 집에도 못 들어가는 내게 새해 아침부터 아내가 문자를 보내왔다. 병원 이름과 예약 날짜, 시간만 적힌 간단한 문자였다.
“바빠 죽겠는데 맘대로 예약을 잡아놓으면 어떡하나, 이 사람아. 바이어가 다행히도 미팅을 다음 달로 미뤘으니 망정이지. 이 좋은 기회가 종이 쪼가리로 다 날아갈 뻔하지 않았는가 말이야.”
하지 않아도 될 투정에 아내의 바늘 돋친 목소리가 휴대전화 스피커마저 바르르 떨게 했다. 내가 의사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사람인가, 하며 다시 언성을 높이니 내 발로 가지 않으니 도리가 있었겠냐며 아내가 더 큰 소리로 대꾸했다. 군소리 말라는 뜻이다.
타고난 건강 체질이라 병원과 인연이 없던 나였다. 일 년의 대부분을 해외에 있으니 그것도 타당한 이유가 됐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꺼림칙한 것을 몸 안에 넣고 다니는 것처럼 모양과 크기도 알 수 없는 불안이 상상 속에서 불꽃처럼 팡팡 터지고 있었다.
2주 전 내시경 검사 후, 마취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희미한 의식 속에 서로 수군대던 병원 관계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또 초음파 검사를 하며 고개를 자꾸 갸우뚱하던 의사의 모습도 머릿속을 스쳤다. 그들은 이미 내 병명을 예견했을까. 그런데도 이 무거운 비밀을 한순간에 압축 시켜 터뜨리기 위해 입을 다물었던 걸까. 그 허상의 비밀이 내 머리채를 낚아챌 때까지 난 전혀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난 지금 몹시 억울하다.
바닥부터 아주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쌓아온 내 사회 업적들, 나라는 울타리 안에 터럭만 한 오류도 허용치 않고 보호해 왔던 가족들 그리고 앞으로 내 삶에 예약된 반짝이는 미래가 점점 졸아들다가 하나의 점으로 사라졌다.
이것은 한 편의 희극이다. 비극과 희극은 한 끗 차이라 하지 않던가. 다만 맨정신으로는 볼 수 없는 희극임에 틀림없다. 정신 나간 미치광이처럼 까무러치게 웃고 싶은 심정이다. 정말 눈물 나게 웃긴다.
“그런데 참 놀랍군요. 이 정도면 증세가 꽤 있었을 텐데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그게 무슨 소리요? 속이 답답한 것 말고는 아무런 증상이 없었단 말이오.”
의사는 검지 손가락으로 코밑을 쓸면서 차트와 나를 몇 차례나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그리고 이따금 고개를 좌우로 기울이며 미간에 작고 깊은 골을 냈다.
“어쨌든... 오늘이 생일인데 이런 결과를 드리게 되어 매우 유감입니다.”
“뭐요? 방금 뭐라고 했소?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분명 의사는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전기 콘센트에 막 코드를 꽂은 선풍기처럼 주변 공기가 윙윙거리며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가속이 붙어 내 몸의 균형을 금세 흩트려 놓았다. 도저히 그 현기증을 버틸 힘이 없었다. 그래서 두 손으로 책상의 모서리를 꼭 붙들고 의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 생일은 다음 달인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그제야 의사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책상에 붙여 앉았다. 그리고 안경을 급히 고쳐 쓰더니 간호사를 불렀다. 나와 같은 이름의 환자가 오늘 1시간 간격으로 예약이 잡혀 있었다는, 그 어떤 희극보다 더 웃긴 이야기.
의사는 간호사가 다시 가져온 내 진짜 차트를 보며 단순 위궤양이라고 연신 고개를 꾸벅였다. 지옥 입구까지 갔다가 단숨에 천국 입구로 옮겨졌다. 같은 이유로 정신 나간 미치광이처럼 까무러치게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료실을 나와 의자에 몸을 뉘듯 앉았다. 몸이 바닥으로 자꾸 쓸려 내려갔다. 손으로 의자를 꽉 붙들지 않았더라면 연체동물처럼 흐물거리며 모두 쏟아졌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열심히 돌고 있었다. 그때 상의 안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아내였다.
“그러게 내가 뭐랬나? 아무 이상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 단순 위궤양이라더군. 아, 당신 저번에 갖고 싶다던 가방 있지 않았던가? 그래, 그거. 하나 사. 뭐 얼마 한다고.”
1시간 전의 나는 죽고, 새로운 내가 탄생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아이처럼 기뻐하는 아내의 전화를 끊자마자 바이어 쪽에서 이번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장문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진짜 이 좋은 기회가 종이 쪼가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 인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였기에 아쉬움이 더 크게 밀려들었다.
“뭐 안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내 감정에만 집중하느라 옆자리에 누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내게 말을 거는 사내는 청소도구를 실은 카트를 옆에 두고 있었는데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거로 보아 이 병원에서 일하는 청소원인 것 같았다.
“아, 안 좋긴 뭐가 말이오. 새해부터 죽다 다시 살아났는데.”
“네. 맞습니다. 안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사는 게 지옥인데 더 나빠질 것도 없지요.”
세상을 통달한 도사처럼 하얀 그의 머리카락이 결을 타고 출렁였다. 그는 가끔 통증이 밀려오는지 몸을 구부정하게 말고는 숨을 멈추곤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매우 고단한 구도자 같기도 해서 선뜻 손을 댈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이상현 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간호사가 호명한 건 바로 내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사내가 호명에 맞춰 움츠렸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도 모르게 그의 바짓자락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악어 껍질 같은 손으로 내 손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그는 짧게 미소지었다. 자기의 운명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아주 편안한 얼굴이었다. 병원 밖으로 나오는 내내 생각했다. 의사는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아주 건조하게 건넸을 것이고, 그 말을 들은 사내는 내게 보여줬던 옅은 미소를 얼굴에 띠었을 것이다.
무거운 마음에 고개를 쳐들었다. 하늘은 슬픔을 예감한 듯 울먹였다. 난 다시 바쁜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깨진 계약 건을 만회하려면 앞으로 더 많이 뛰어야 하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도 보내야 하고, 내 반짝이는 미래에 예약된 과업들을 차례로 수행해야 하니까. 그런데 참 이상했다. 내가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그 날, 천국은 내게 여전히 멀어 보였고, 그 파란 유니폼의 사내에게는 10cm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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