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생활-전병두 목사] 조용한 죽음
- 23-12-26
전병두 목사(오리건 유진중앙장로교회 담임)
조용한 죽음
스파(SPA)는 아내가 일주일이면 5일을 꼭 찾는다. 무릎이 부어오르고 통증이 심해지면서 물속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몇 해동안 꾸준히 운동한 결과 예상 외로 많이 호전되었다. 지금은 여간 바쁜 일이 아니면 빼지 않는 일과가 되었다.
아내를 스파에 내려놓고 막 돌아서는 데 평소 잘 알고 지내는 교포 한 분이 바로 앞에 나타났다.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대화 어머니였다. 운동복 차림인 것을 보면 스파 2층에서 운동을 하기 위해 온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운동하러 오셨군요”
“네, 안녕하세요? 요즘 어떻게 지나세요”
차를 세워두고 함께 스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 만에 만난 그는 스페인 친구 집에서 몇 달 지내고 돌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좋은 추억을 많이 쌓고 왔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다시 멕시코로 여행을 다녀 온 여행담도 즐겁게 들려 주었다.
그는 낙천적인 성품의 소유자 답게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외국 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은 것 같았다. 음식도 가리지 않고 어디에 가도 잘 먹는다고 했다. 다음 주 중 함께 만나 맛있는 음식을 같이 먹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한 주일 후 다시 만나기 위해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가 되지 못했다. 몇 일이 지난 후 그의 남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화어머니가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다. 갑자기 다리가 마비되고 어지러워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의 권고를 받고 정밀 검사를 받고 있다고 했다.
뇌 부분을 집중적으로 단층촬영을 한 결과 뇌종양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최종 진단은 뇌암으로 판명되어 급히 수술실에 들어갔지만 암세포가 이미 넓게 퍼져서 손도 쓰지 못하고 덮고 말았다고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진단 결과였다.
대화는 어머니를 모시고 더 큰 병원이 있는 포틀랜드로 갔다. 결과는 같았다. 앞으로 생존 기간은 반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진단이 나왔다. 대화 어머니는 사실로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설마 그렇게 빠르게 병이 진행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얼굴이 많이 축난 것도 아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몸에 이상을 느끼지 못했었다.
아들과 함께 여행계획까지 짜 두었는 데 불과 이 몇주 사이에 이런 일이 닥쳐오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다리의 통증은 심해져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한 발자욱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더 심해지기 전에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과 함께 식사라도 하고 싶었다. 친구의 주선으로 가까운 뷔페 식당에 모였다. 친구들은 밝은 표정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속으로 울었다. 그 날도 대화의 주도권은 늘 그랬듯이 대화 어머니에게 있었다.
그는 처음 방문했던 스페인 여행 이야기며 멕시코에서 겪었던 무용담들을 재치있게 풀어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가 환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몸이 회복되면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친구들은 차마 그와 잡은 손을 한동안 놓지 못했다.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갔다. 말이 어눌해져갔다. 전화 통화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음식은 거의 삼키지도 못했다. 대화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차례 씩 정신을 잃곤했다. 다시 회복하리라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 오직 기적만 바랄 뿐이었다.
멀리 떨어져 사는 딸이 달려왔다. 대화의 바로 위 누나다. 수척한 어머니를 보고 말문이 막혔다. 고운 엄마의 손등은 찌들어가고 있었다. 얼굴은 금방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수척해졌다. 고통스러워하는 엄마를 볼 때마다 차마 얼굴을 쳐다 볼 수 없었다.
대화가 누나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나... 엄마를 이대로 고통받게 하도록 내버려 둬야 해?”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니... 의사도 손을 놓은 마당에...”
한참 동안 남매는 침묵을 지켰다. 대화의 머리 속에는 '안락사'라는 말이 맴돌고 있었다. 언젠가 그의 친구 아버지가 몸져 누워 고통스러워 할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 친구는 가족들을 모아 회의를 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안락사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때 대화는 친구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친구의 입장이 아니다. 바로 자신의 문제로 다가온 것이다. 어머니는 의식이 맑아 졌다가 이내 다시 혼돈에 빠져들곤했다.
“엄마를 평안히 보낼 길은 무엇인가...”
인터넷을 뒤지고 관련 서적을 빌려 읽었다.
“안락사를 법으로 인정한 최초의 주는 워싱턴주와 바로 인접하고 있는 오레곤주이다. 미국에서 안락사를 합법으로 인정하는 주들이 점점 늘고 있다. 2015년에는 캘리포니아주가 6번째로 허가되었고 2019년도에는 뉴저지주가 허용을 하였다. 같은 해 메인주가 뒤를 이었다. 안락사는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나라들도 뒤를 따르고 있다.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델란드등은 이미 시행중이고 캐나다도 합법화되었다...”
대화 어머니를 안락사 시키기로 가족들이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큰 충격이었다. 안락사는 도대체 무엇인가? 사전을 뒤져보았다.
“안락사라는 어원은 헬라어 유타나시아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다. 그 의미는 ‘좋은 죽음’ ‘아름다운 죽음’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죽음이란 말이 아름다운이란 말과 조화가 되는지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름다운 죽음이든 슬픈 죽음이든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이 죽음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적어도 우리 동포나 우리 가정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해 왔다.
실제로 이곳에 살아 온 지난 30년 동안 교포 중에서는 단 한 사람도 안락사를 선택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동포가 안락사에 직면해 있다. 우선 내가 살고 있는 오레곤주에서 실시되고있는 안락사의 비율도 예사롭지 않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시행되어 그런지는 모르지만 사망자 500명중 1명꼴로 안락사가 증가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만일 사랑하는 나의 가족 중 한 사람이 죽음에 직면해 있고 고통스러워한다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가? 침대에 누워 천정만 바라보고 있을 엄마의 옆방에서 안락사를 말하는 아들과 딸의 조용한 음성을 들어야 하는 엄마의 마음이 어떨까...
안락사를 시키고 싶지는 않다. 사람의 생명을 사람의 손에 의지하는 것부터 당돌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의 생명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늘의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 최소한의 우리의 도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죽음의 침대 위에서 조용한 죽음을 맞이하는 대화 어머니 생각에 새벽 별이 떠오른 것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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