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까마귀가 있는 풍경
- 23-12-11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까마귀가 있는 풍경
낯선 소리에 귀가 따가웠다. 창밖을 내다보니 덩치 큰 까마귀 한 마리가 뒷마당에 있는 배나무 가지를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잘 익은 배 하나가 뚝 떨어졌다. 녀석이 신나서 요리조리 뛰어다니면서 배를 쪼아댔다. 나도 며칠 전부터 입맛을 다시고 있었는데 녀석이 한발 빨랐다. 포만감인 양, 승리의 환호성인 양 녀석이 목청을 돋우었다.
“까마귀야, 그만, 시끄러워 죽겠다.”
내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녀석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녀석이 떠나자 작은 새들이 날아와 포르릉 포르릉 뒷마당을 날아다녔다. 문득 미국에서는 까마귀가 길조라는 게 떠올랐다. 무슨 좋은 소식이 있으려나. 뜬금없이 까마귀가 날아들다니. 오후에 까마귀가 다시 찾아와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다가 갔다. 그날 저녁 텍사스에서 우리가 살기에 알맞은 집을 찾았다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한 달 후, 남편과 나는 시애틀을 떠나 워싱턴, 아이다호, 유타, 콜로라도, 뉴멕시코주를 거쳐 텍사스에 도착했다. 주의 경계에 들어서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무지개가 긴 팔을 벌려 우리를 맞아 주었다. 텍사스의 하늘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몇 시간만 더 가면 새로운 보금자리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설렜다.
드디어 집 근처까지 왔다. 큰길에서 벗어나 동네 길로 들어서는데, 첫 표지판에 Lucky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네잎클로버를 찾은 기분이다. 그간의 여독이 확 풀리는 것 같았다. 기분 좋게 Bravo 길을 지난다. 어서 새집에 들어가 잔을 높이 들고 부라보! 외치고 싶다. 다음은 Gabriel's Horn이다. 가브리엘 천사의 환영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한 길을 지나 Leppy로 들어선다. 어린 송아지들의 유치원 마당 같은 잔디 운동장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어지는 길은 Bobtail이다. 길 건너 야트막한 동산에 큰 고양이들이 살고 있을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듯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왼쪽으로 Jay Bird가 우리를 맞는다. 두 눈이 동그래진 앨리스의 머리 위로 파랑새가 날개 치며 날아들 것 같다. 한 번만 더 방향을 바꾸면 우리 집이 있단다. 마침내 까마귀들이 뛰노는 풍경, Crow Hop View로 들어섰다.
신기하게 까마귀 몇 마리가 날아와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한 달 전 뒷마당에 나타났던 까마귀가 제 친구들에게 전보라도 친 걸까. 그날, 아침에 까마귀가 출몰한 것과 저녁때 집 소식이 온 것을 굳이 연관 짓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며칠간 기다려 보았지만 더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살게 될 집이 까마귀가 뛰는 풍경 안에 있다니. 집 앞에 다다르자 또다시 까마귀 떼가 날아와 하늘에 커다란 원을 몇 차례 그리고는 사라졌다.
노아의 방주가 떠올랐다. 텍사스에 들어서면서 보았던 무지개와 까마귀 때문이었던 것 같다. 까마귀를 좇아 마침내 방주에서 나온 노아처럼 나도 까마귀를 눈으로 좇으며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신선한 공기에 가슴을 활짝 열었다. 시애틀에서 텍사스까지 닷새간의 여정이 그렇게 막을 내렸다.
다음날 우편함 주위에서 통통 튀어 다니며 한가롭게 노는 녀석들을 보았다. 그날처럼 우악스럽지도 시끄럽지도 않았다. 여느 새들처럼 평화로웠다. 까마귀가 있는 풍경 이 내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급류에 휩쓸리듯 갑자기 시애틀을 떠나왔다. 가게와 집을 동시에 정리하느라 몸이 몇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짐 보따리처럼 늘어가는 생각들을 미처 풀어볼 겨를도 없이 이삿짐과 함께 싣고 왔다. 모든 게 퍼즐처럼 맞춰져 가는 일련의 상황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몸에 힘을 빼고 들숨과 날숨을 계속 이어가는 것뿐이었다. 인생은 그저 닥치는 대로 사는 거라던 엄마의 음성이 더욱 또렷이 들리는 것은 이제야 엄마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일 게다.
방주 안에 있던 노아에게 까마귀가 표식이 되어 그의 삶을 이끌었듯이 내게도 까마귀가 어떤 기호가 되고 있는지 모른다. 무지개나 동네 길 이름에서 의미를 찾아 삶에 빗대어보는 게 재밌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나의 유약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러나 일상에 주어지는 작은 것들을 무의미하게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에 대한 이해와 해석에 따라 삶이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갈 수 있을 테니까.
오늘은 물걸레를 들고 집안 구석구석 쌓인 먼지를 닦아내야겠다. 그러다 어느 한 귀퉁이에서 네잎클로버 하나 찾아낸다면, 부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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