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이야기-전병두 목사] 더 큰 승리
- 23-06-26
전병두 목사(오리건 유진 한인장로교회 담임)
더 큰 승리
오늘은 루스(한국명 김솔)씨가 오레곤 주립대학교를 졸업하는 날이다. 딸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에서 부모님이 찾아오셨다. 세 아이를 기르면서 기어이 졸업장을 받게 된 딸의 졸업을 누구보다도 대견스러워했다. 졸업식은 도서관 뒤 잔디 밭에서 진행되었다. 아버지는 녹색 가운을 걸친 딸을 앞에 세우고 여러 장의 기념 사진을 찍었다.
루스씨는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누구보다도 컸다. 아버지는 루스씨가 아직 어렸을 때 생면 부지 젊은이의 목숨을 구한 장한 일을 하셨다. 14년 동안 신장기능 장애로 투석을 받으며 신장 기증을 애타게 기다리던 한 젊은이를 소개받고 선뜻 자신의 건강한 한 쪽 신장을 떼어 주신 분이다.
졸업식은 축제였다. 이날 따라 하늘은 맑고 흰구름 사이로 푸른 색이 유난히 돋보였다. 그 푸르름 속에 옛 친구 봉구의 얼굴이 나타났다.
학창 시절의 어느 여름 날 오후였다. 친구들이 왁자지껄 놀고 있는 데 봉구는 한쪽 구석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시력은 겨우 형체만 알아볼 정도로 약했다. 책을 펼치면 눈동자를 5cm정도로 가까이 대고도 떠듬거리곤 했다. 그에겐 가까운 친구가 없었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그와 함께 잔디 밭에 앉았다. 하늘은 유난히 파랬고 구름이 수를 놓고 있었다.
“봉구야 졸업 후라도 종종 연락도 하고 만나기도 하자. 혹시 내가 너를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줘.”
몇 달 후 봉구에게서 편지 한통이 날아왔다.
“…병두야, 너는 내 마음의 친구가 되어 줘서 참 고마왔다. 우리 어머님이 너를 보고싶어 하는 데 한번 놀러 오지 않을래? 버스를 하루 종일 세번이나 갈아타고 도착한 곳은 합천군 묘산면에 위치한 관기리라는 마을이었다.
조용한 마을에 봉구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만난 것처럼 반갑게 대해 주었다. 저녁상을 차리는 데 얼굴을 거의 밥상에 가까이 대고 반찬 그릇을 놓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시력도 아들과 비슷해 보였다. 어머니의 약시가 아들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봉구와 그 어머니의 친절함을 잊을 수없었다.
어느 날 봉구에게서 다시 편지가 왔다.
“…친구야…우리 동네 용한 선생님이 그러는 데 내 눈도 고칠 수가 있다더라. 누가 눈동자를 기증해 주면 가능 하단다. 하지만 누가 눈을 주겠니? 그냥 이대로 살 수 밖에 없지…”
봉구의 편지는 가슴 깊이 박혔다. 몇일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봉구에게 눈을 기증할 친구는 바로 나라는 생각이 큰 바위처럼 무겁게 실려왔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답신을 보내야만 할 것 같았다. 새벽이 밝아 올 때까지 수 없이 편지를 쓰고 지우고 고치곤 했다. 멀리서 새벽 종소리가 들릴 무렵에야 편지는 완성되었다. 우체통에 넣기만 하면 된다.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을 망서리다 다시 꺼 낼 수 없는 통 안으로 어렵게 쑤셔 넣었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한눈으로 생활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오른 쪽 눈을 감고 천정을 주시하는 일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화장실에도, 세면대도 왼쪽 눈만 뜨고 들락거렸다. 처음에는 무척 답답했다. 거리감이 없어서 쉽게 벽에 부딛히곤 했다. 그 때 마다 손으로 확인하고 다시 그쪽 눈을 감았다. 열흘쯤 지나자 한눈으로 생활하는 것이 어쩌면 가능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외눈으로 좁은 길을 걷는 법, 버스를 오르는 법도 차츰 익숙해 지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아는 사람을 길에서 만나면 눈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곤했다. 가족들에게는 눈이 아파서 곧 수술을 받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두 눈으로 볼 수 있을 때 많이 봐 두고 싶은 것은 파란 하늘이었다. 얕은 구름 사이로 비치는 그 하늘을 실컷 봐 두고 싶었다. 눈을 하늘로 들면 구름 사이에는 친구의 밝게 웃는 모습이 보이곤 했다.
기다리던 편지가 왔다. 지난 번 보낸 편지 답신이었다. 그때 보낸 편지에는 눈 수술을 받을 병원과 날자를 알려 달라고 했었다. 가능하면 큰 병원으로 정하자고도 했었다. 서울까지는 못 가더라도 합천에서 가까운 대구 쯤이면 어떨까라고 제안했었다. 봉투를 뜯던 손이 떨려 하마터면 편지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병두야, 고마워. 네 편지를 받고 엄마와 한참 울었다. 그 이튿날 대구 동산병원 안과를 찾아갔었지…종일 많은 검사를 받은 후 의사를 만났다. 과장의사께서는 현재의 안과 기술로는 내 눈 이식은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하지만 너의 마음을 잊지 않을 께…고마워, 친구야…”
맥이 탁 풀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신이었다. 패잔병의 마음이 이럴까?.
그날부터 외눈 박이 생활 연습은 중단되고 말았다. 오랜 만에 봉구집에 찾아 갔다. 어머니는 많이 노쇠해 보였고 봉구는 아주 두터운 렌즈로 된 안경을 끼고 있었다. 우연히 꺼집어 낸 그의 지갑 안에는 여러 해 전에 내가 보낸 편지가 까맣게 때가 묻은 채로 꼬깃 꼬깃 접혀 있었다.
졸업식장의 마이크에서는 한 명 한 명 졸업생 명단이 들려지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면 단상 위에 올라 졸업장을 받은 후 학장과 포옹을 하고 내려가고 있었다. 청중들은 큰 박수와 휫바람을 불었고, 어떤 학생의 가족들은 풍선과 오색종이를 하늘로 날리기도 했다.
“루스 김”
갑자기 낯 익은 이름이 귓전을 두드렸다. 우리는 조용히 함박 웃음으로 루스씨의 졸업을 축하해 주었다. 아버지는 개선 장군을 맞이하는 모습이었다.
“아버님, 진심으로 축하, 축하 드립니다…훌륭하신 아버님의 대견스러운 딸입니다. 딸도 승리하였지만 아버님은 더 큰 승리를 하셨습니다” 아버님의 모습 뒤로 옛 친구 봉구의 얼굴이 겹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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