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공순해] 수다 한 판
- 23-06-26
공순해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수다 한 판
어머니, 그 얘기 들으셨어요? 부엌에 갔을 때 며느리가 말했다. 무슨? 한국에서 일어난 학교 얘기예요. 학생들 야외 학습 가정통신문을 보내며 중식은 학교에서 준비합니다, 써 보냈대요. 학부모에게서 어떤 반응이 일어났다고 예상하세요? 글쎄에. 우리 아인 중식을 싫어합니다. 아예 안 먹는데 다른 걸로 준비해 줄 수 있나요, 했대요. 하하, 중간 식사란 말을 중국식 음식으로 알아들었구나. 우리는 합창하듯 웃었다.
그 중식이란 말이 하긴 웃기지. 중식이란 말을 쓰기 시작한 건 한국에서 새마을 운동이 일어난 후 먹고살 만 해져 마을 단위 단체 관광 붐이 한창 일어날 때였는데, 그 풍습이 일본의 영향으로 온 건지, 중식이란 말도 같이 건너왔어. 관광은 이동하며 하는 것이니 이동 중 필요할 때 중간 식사를 한다는 뜻이었는 걸. 그게 그렇게 오래된 말이었어요? 몰랐어요. 점심이란 말 대신인 줄 알았어요.
내가 어렸을 땐 먹을 게 부족했기에 점심이란 말도 잘 안 썼어. 전쟁 직후, 그땐 모두 시계가 없어 마을에서 사이렌을 불어줬어. 밤 12시 자정에 울리면 통행금지, 낮 12시 오정에 불면 점심 먹어라, 이런 뜻으로. 오정이란 말 들어본 적 있니? 아니요. 자정은 알지만 오정은 들어본 적도 없어요. 그래서 그땐 아이들이 떼쓰고 울면 사이렌 소리처럼 시끄럽다고, 오정 분다, 밥 먹어라, 놀렸어. 하하. 그런 일도 있었군요. 옛날얘기 같아요.
소비가 점점 더 세련되어 가 요즘엔 마을 단위 버스 단체 관광도 드물어. 생활 습관도 바뀌어 중식이란 말도 잘 안 쓰게 돼 일어난 일이니 없어진 말이 얼마나 많겠어. 하지만 아이들로야 못 들어본 말이겠지만 부모들조차 못 들어 본 말이 되면 대체 생활 문화가 얼마나 바뀐 거야. 그러니 두부 한 모판도 못 알아듣겠다. 한 모판이요? 응. 두부 판매 단위가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니? 판매 단위가 있어요? 그냥 마켓에서 한 컨테이너 들고 오면 되는 거 아니에요? 하하, 옛날엔 두부를 가게에서 잘라서 한 모씩 신문 종이에 싸서 팔았어. 그래서 여러 모를 담은 판을 두부 모판이라고 했어. 한 모판이 두부 30개였어. 그건 더 옛날얘기, 동화책에 나오는 얘기 같아요. 신문지에 두부를 싸서 팔다니요.
두부뿐이니. 콩나물 한 줌도 구멍가게서 샀어. 물론 쭉 찢은 신문지에 싸 줬지. 새끼줄에 엮어 연탄 한 개도 팔고. 연탄요? 가스 냄새로 사람이 죽기도 했다던 연탄요? 연탄 본 적 있니? 아니요. 옛날 TV 드라마에서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어요. 그러니 없어진 게 도대체 얼마예요.
하긴 늘 먹고 싶다고 타령하는 주염떡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전에는 표제어로 나와 있었는데 요즘엔 빠졌더라. 낱말이 사라지면 그 실체도 사라지는 것. 이름을 불러줘야 꽃이 된다잖니. 앞으론 주염떡을 어디 가서 먹어 볼까. 주염떡 잘 만드는 큰이모 돌아가시면 그나마도 잊혀지고 말겠지.
또, 말 가운덴 너와 나만이 사용하는 어휘도 있게 마련인데 사람이 바뀌고 사라지면 말도 저절로 없어지게 되지. 예전에 외할아버지 살아 계실 적에 뭔가 채워지지 않고 정량에서 부족해 보이면 ‘헤실났다’고 하셨는데 요즘 사전에 찾아보면 아예 표제어로도 나와 있지 않아. 아무리 말이 생겨나고 자라고 죽기도 한다지만 불과 백 년도 안 살았는데 이렇게 사라진 게 많다니. 시속 60마일로 달리는 고속도로 위에 생활을 펴고 살고 있는 것만 같지 않니. 서부 활극 영화 속에서 사는 것처럼 사방으로 총질해 대며…. 전쟁이 일어난 전시도 아닌데 사람은 또 왜 그리 많이 죽는지… 일상이 그냥 전쟁 아니니. 출근하던 사람이 교통신호 대기 중에 총 맞아 죽다니 말이 돼? 이러단 방탄복이 출근복, 아니 일상의 외출복이 되겠다. 생때같은 목숨 잃은 사람들의 남겨진 가족들은 또 얼마나 애통할 것이고…
맞아요. 그러니까 어지럽고 갈등도 심해지고 잊어버리는 속도도 자꾸 빨라지는 것 같아요. 저보다 어머니가 더 기억력이 좋으시다니까요. 하하. 밖에 나가 온갖 것을 직접 부딪치며 살아내야 하니 왜 안 그렇겠니. 그 점 이해된다. 에구, 불쌍한 것들!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켰다. 목숨 가진 우리 모두 불쌍한 것 아닌가. 수다는 즐거웠지만 끝맛이 왜 이리 아쉽고 씁쓸할까. 무척 속이 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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