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생각-김윤선] 빈자일등(貧者一燈)
- 23-05-29
김윤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빈자일등(貧者一燈)
배추 한 포기를 샀다. 샤브샤브를 해먹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날 이후 집에서 차분히 그것을 해먹을 기회가 없었다. 내일, 내일 하다가 일주일이 지났고 그리고는 잊어버렸다. 게다가 차고에 있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더니 쉬 눈에 띄지 않았다.
한 열흘이 지나서야 문득 배추 생각이 났다. 때마침 비도 내려서 배춧국 끓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마치 오늘을 위해 비축해 두었던 듯 신바람이 났다. 배추를 꺼냈다.
배추는 비닐봉지에 싸인 채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진작 신문지에 싸둘걸, 얼른 보니 색과 모양을 잃지 않았다. 오우, 예스. 쾌재를 부르며 도마에 놓고 키대로 반을 쩍 갈랐다. 어머나, 이럴 수가. 겉보기는 멀쩡한데 속에 들어갈수록 이파리마다 검은 곰팡이 같은 게 점점이 박혀 있었다. 이게 웬일, 곰팡이가 이곳을 비밀의 방으로 삼은 것일까. 아니면 주인의 무관심한 손길에 화난 배추가 스스로 분노를 키운 흔적일까.
예전에 샀던 바람 든 무도 그랬다. 암팡진 무가 겉모양과는 달리 속에 듬성듬성 구멍을 내어서 바람을 잔뜩 들여놓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그때의 낭패감이라니, 세상사 겉모습에 혹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바람 든 무는 채수라도 낼 수 있지만, 곰팡이 슨 배추를 어디에 쓰랴. 쓰레기통에다 팍, 던져 넣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고 한순간에 국거리를 잃은 낭패감에 혼자서 씩씩거렸다. 따지고 보면 배추 탓이 아니었다. 때맞춰 먹지 않은 내 게으름이고 허술하게 보관한 내 실수였다. 먹거리로 자라기 위해 견뎌낸 지난 시간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렸으니 저로서도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았을까. 씨를 발아하고 뿌리를 내리고 잎을 키우고 속을 채우느라 보낸 시간을 지금이라도 보상하라고 대들 것 같았다. 차라리 내가 사 오지 않았더라면 누군가의 먹거리가 됐을 텐데.
최근에 총기사건이 잦다. 특히나 초등학교 교정에서까지 무차별 난사가 이어지고 있다. 교사와 아이들이 사망한 충격적인 사고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엔 텍사스주 댈러스 교외에 있는 대형 쇼핑몰인 앨런 프리미엄 아울렛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안타깝게도 한인 가족 세 명이 희생당했다. 아들이 생일 선물로 받은 옷이 커서 교환하려고 나왔다가 변을 당했다고 한다. 범행동기가 분분하지만, 이들 사건의 대부분이 가슴속에 쌓인 분노의 폭발에서 비롯된다. 공정하게 대우받지 못한다는 울분, 냉장고 속 배추의 분노를 이해할 만하다.
사람이 건강한 삶을 유지하려면 사람 간에 소통이 있어야 한단다. 관심과 사랑의 물주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소통은 분노를 녹이는 통로다. 그런데 손끝만으로도 세상과의 소통을 일삼는 IT세대 젊은이들의 우울증 호소가 늘어나는 건 웬일일까. 접속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접촉의 온기 부족 때문이 아닐까.
5월은 사랑을 전하는 달이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가족 사랑으로 마음이 따뜻하다. 게다가 미국을 위해 싸운 모든 전사자를 기리는 메모리얼 데이도 있다. 소통한다는 건 반드시 산 사람과의 교감만을 의미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부처님 오신 날(음력 4월 초파일)도 있다. 올해 봉축 표어는 ‘마음의 평화, 부처님 세상’이다.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인한 불안한 일상을 이겨냈으니 부처의 가르침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고, 모두가 평등하게 공존하는 부처님 세상 되기를 염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내게는 모두가 마음을 열고 소통을 많이 하라는 말로 들린다. 소통이야말로 서로의 갈등을 녹이는 영약일 테니.
부처님 오신 날에 ‘빈자일등(貧者一燈)’이라는 말이 마음을 움직인다. 석가모니 부처가 사위성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왕과 백성들이 등 공양을 준비했다. 가난한 노파인 난타 또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등을 공양했다. 그런데 밤새 강한 바람으로 모든 등불이 다 꺼졌는데 오직 난타가 공양한 등만은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한 데서 비롯한 말이다. 물질보다 정성이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이지만 나는 부처와 그녀 사이에 이루어진 감정의 소통을 읽는다. 부처에게 귀의하는 낮은 자세와 가난한 노파에게 베푸는 부처의 자비심이 올 5월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공연히 심통을 부리며 쓰레기통에 쑤셔 박은 배추에 멋쩍다. 슬쩍 뚜껑을 열어보니 웃어 보일 수도, 화내 보일 수도 없는 엉거주춤한 내 얼굴에 대고 배추가 말했다.
“니 마음이 내 마음이야.”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시애틀 뉴스/핫이슈
한인 뉴스
- 린우드 베다니교회 ‘여름성경학교’운영
- [시애틀 수필-염미숙] 메모리얼 벤치
- [신앙과 생활-김 준 장로] 양심과 구원(1)
- 서은지총영사, 코리아나이트 시구 외교부 유튜브채널로 제작돼(+영상)
- 시애틀한인회,유급병가 세미나 개최한다
- [하이킹 정보] 시애틀산우회15일 합동산행
- [하이킹 정보] 워싱턴주 시애틀산악회 15일 산행
- [하이킹 정보] 워싱턴주 대한산악회 15일 토요산행
- 삼성 이재용, 시애틀서 아마존 CEO만나
- “한인상공인 여러분,그랜트나 대출기회 넘쳐요”
- “22일 베냐로야홀서 무료 공연 즐기세요”
- “전주서 열리는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 신청하세요”
- 한인학부모회 미술대회서 리아 최,엠마 양 ‘대상’
- 서북미문인협회 20회 뿌리문학신인작가상 공모한다
- 창발 한인들 참여하는 자선기금마련 테니스대회 개최한다
- “시애틀 한인여러분, 호주와 뉴질랜드여행 어때요?”
- 한국학교서북미협의회, 5개 행사 종합시상식 열어(+화보)
- 이번 주말 제74주년 6ㆍ25 합동기념식 열린다
- 재미대한탁구협회 회장배 대회 열린다(+영상)
- 시애틀 통일골든벨 ‘성공’…김환희군 1등 영광 차지(+영상,화보)
- <속보> 오늘 정부납품 세미나서 한인상공인 위한 플렉스 펀드도 설명
시애틀 뉴스
- 빌 게이츠 "차세대 원전에 1.4조 투자…향후 추가 투입"
- 미 패스트푸드 업계, 고물가 속 "5달러" 메뉴로 가격인하 경쟁
- 시애틀 날씨 하루새 비, 바람, 우박, 햇빛까지(영상)
- 워싱턴주 야키마지역 농장 가뭄으로 벌써부터 물부족
- 워싱턴주 의료용 마리화나 판매세 없어졌다
- 시애틀서 장장 56년간 아이들 가르친 여교사 은퇴
- 시애틀 방치된 빈집 강제철거 빨라진다
- "아마존, 직원들에 MS 클라우드 플랫폼 데이터 수집 지시"
- 아마존 시애틀 등 서민주택사업에 14억달러 추가 투자한다
- 올 여름에도 시애틀 '누드비치 공원' 그대로 운영된다
- 삼성 이재용, 시애틀서 아마존 CEO만나
- 시애틀 매리너스 23년만에 디비전 1위 노린다
- "타코마 교차로 위험 알고도 방치해 6명 사망"(영상)
뉴스포커스
- 尹 "환자 저버린 불법 진료거부, 엄정 대처…의료개혁 흔들림 없다"
- 국힘 "상임위 野단독 강제 구성 안돼"…헌재 권한쟁의심판 청구
- '1강' 한동훈 출마선언 임박…나경원·유승민 '이변' 노린다
- "이정재, 290억 유증 무효" 래몽래인 개미 12명에 소송당했다
- 10대 마약사범 올해만 198명 검거…5년 만에 10배 증가
- 육아 단축근무, 당당하게…업무분담 동료가 수당 받는다
- 고2 기초학력 미달, 역대 '최악'…방과 후 확대로는 "안될 텐데"
- 제2의 누누티비 운영에 성착취물 유포까지…30대 운영자 검거
- 3493억 vs 769억…'10년의 차이'가 개인투자용 국채 성과 갈랐다
- 라인야후 주총 메시지에 쏠린 눈…'기술적 탈네이버' 계획 나오나
- "잘나가는 K-뷰티 올라타자"…생활가전 업계, 본격 참전
- 삼성전자, '포브스 선정' 세계 기업 순위 21위…현대차 93위
- 최태원-노소영 이혼 판결 오류 "1조짜리일까"…"단순 실수" 의견 분분
- '집단휴진' 기간 아프면 어딜 가야할까…전국 408개 응급실도 운영
- 최태원 "'6공 후광' 판결로 SK 역사 부정당해…상고 결심" 공개 반박
- 유시민 "노무현재단·내 계좌추적" 주장…'한동훈 명예 훼손' 벌금형 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