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유세진] 본성과의 조우
- 23-05-15
유세진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본성과의 조우
봄기운이 완연해선가. 눈이 오고 비가 내려도 반려견과 어김없이 나서던 산책인데, 그날따라 꽤 설렜다.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듯 산뜻했고, 마음은 풍선을 품은 듯 둥실 떠 있었다. 무심코 지나치던 나무 하나에 들뜬 시선이 머물더니 온 신경이 그 속으로 빠져들었다. 언제 꽃이 지고 새잎이 돋았을까아아… 악! 한순간에 감미로운 감상이 산산조각 났다.
가벼운 마음만큼 줄을 잡은 손아귀 힘도 느슨해졌나 보다. 지나가는 개를 보고 우리 집 강아지가 흥분해 달려 나가는 것을 미처 제어하지 못했다. 순식간 목줄에 발이 엉겼고, 나는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꽈당하고 넘어지는 순간, 직감했다. 낭만이고 갬성이고 현실을 직시할 타임, 현타가 왔다는 것을. 길어지는 우기에 근력은 약해지고 정신 줄 또한 많이 헐거워졌다.
쓰라린 턱과 손등에서 피가 보이고 무릎은 욱신대는데, 다른 생각은 하나 들지 않았다. 오로지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은 마음뿐. 날뛰던 강아지도 뭔가 불안한 낌새를 느꼈는지 순순히 따라왔다. 집 앞에서 벌어진 일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아무렇지 않은 척 조금만 걸으면 뒷마당으로 들어가 쏟아지는 민망함을 감출 수 있었다.
서둘러 울타리 문을 여는 순간, Ma'am, are you okay?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했던 장면을 누군가 생생히 지켜본 모양이다. 게다가 비슷한 시간대에 걷다가 늘 마주치던 동네 청년이라니. 아는 사람의 친절이 그때만큼은 정말로 달갑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 대신 퉁명스러운 대꾸를 내뱉고 얼른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일 초 뒤, 아차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매몰차게 닫힌 펜스 문 뒤에서 황당해하는 청년의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좋은 날, 아주 짧은 산책은 나에게 피맺힌 외상뿐만 아니라 낯부끄러운 내상마저 깊이 남겼다.
몸에 난 상처는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여 얼추 다스렸는데 마음의 자괴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걱정과 웃음을 동시에 내비치는 가족의 위로가 영 못마땅했다. 막내 딸내미라며 마냥 이뻐하던 반려견도 그날은 정말 꼴 보기 싫었다.
고상하고 우아한 이성의 가면을 봄바람이 훅 벗겨버린 틈을 타, 본성이 고개를 쳐들었다. 다 너 때문이야! 라고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복잡 미묘한 성질의 그물을 얼기설기 치고 먹잇감이 걸려들기만을 노렸다. 잡히기만 하면 모든 굴욕과 수치의 독을 몽땅 쏟아낼 요량이었다. 하지만 동물은 본능적으로 천적을 피하는 육감이 발달해 있나 보다. 가족뿐만 아니라 강아지마저 내 눈치를 살살 보며 거리를 두었다. 결국, 독기는 고스란히 나에게 스몄고 생활은 곧 마비됐다.
오후 내내 침대에 쓰러져 있었다. 몸도 마음도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누워 내면을 들여다보는 고요한 시간만이 이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멍때리다 보니, 몹시 기죽어 있는 본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성질부리다 움츠려 있는 게 하도 딱해서 살며시 말을 건넸다. 겨울이 참 길었지? 오랜 시간 견디느라 수고했어. 짓눌렸던 어깨에 봄바람이 스쳐서 살짝 들떴구나. 그치? 못 알아줘서 미안해. 그럴 수도 있지, 흔들릴 수 있지, 뭐.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나니 힘을 잃은 감각이 스르르 되살아났다. 긴장한 근육도 노곤히 이완되고 영혼의 해독제가 밤새 꿀잠을 재웠다.
다음날 새로운 기운이 솟았다. 밝은 얼굴로 어제 일을 깔깔대며 먼저 꺼냈더니, 곁으로 가족들이 모여들었다. 강아지도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뒷마당에 나타난 산토끼를 잡으러 또 튀어 나갔다. 사냥개 본성을 어찌 막으랴. 위태로웠던 감정의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고 무사히 넘어간 데는,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성찰이 본성과의 조우를 도왔기 때문일 거다.
모자만큼 익숙해진 마스크로 턱 아래 퍼런 멍을 가리고 다시 산책을 나선다. 남이야 멍이 들든 말든 자연은 온갖 군데 꽃무늬를 그리며 한껏 흥을 부린다. 부럽다 못해 얄밉게 봄이 또 현혹하지만, 이번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줄을 단단히 붙잡으리라. 그래도 오늘만큼은 그 청년을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시애틀 뉴스/핫이슈
한인 뉴스
- 대한부인회 11일 간병인 모집행사 "시간당 21.17~24.28"
- 생활상담소, 시애틀시 범죄피해자기금 전담기관으로 선정
- 영오션 한국산 광어회와 참돔회 판다
- UW서 해녀 전시회 열린다
- "시애틀 한인여러분 운동도 하고 선물도 받고"
- 김원준 작가 ‘6ㆍ25 및 DMZ사진전’오리건서도 큰 인기
- [신앙과 생활-김 준 장로] 양심과 구원(2)
- [서북미 좋은 시-정혜영] 공작단풍 그 이름을
- 오리건주와 워싱턴주 목회세미나 및 말씀사경회 열린다
- 오리건주서 6ㆍ25 제74주년 기념식 열려(+화보)
- 시애틀영사관 한국국적 일반행정직원 채용한다
- [하이킹 정보] 워싱턴주 시애틀산악회 29일 토요정기산행
- 이장우 대전시장 명예 시애틀한인회원 됐다(화보)
- US메트로 김동일 행장 임기 3년 연장키로
- US메트로은행 '미 전국 중소은행중 실적 탑 20'에 들어
- 이장우 대전시장, 스타벅스 관계자 만나 '로스터리 대전건립 추진'
- 재미 한인 탁구인들의 축제 성황리에 열렸다
- KWA대한부인회 타코마아파트 다음달 신청받는다
- 시애틀-대전 자매도시 35주년 기념행사 화려했다(영상,화보)
- "한국일보 청암장학생 신청하세요"
- 시애틀 한인중고생 위한 SAT캠프 열린다
시애틀 뉴스
- 워싱턴주 생계비뿐 아니라 장례비도 많이 올랐다
- 린우드 얼더우드몰 왜 이러나…또 총격 13살 소녀 사망
- 시택공항 중국,대만, 영국 등 국제노선 대폭 늘어나
- 아마존 창업자 베이조스, 주가 급등하다 50억달러어치 팔기로
- 워싱턴주도 어린이인구 줄어들고 노인들은 늘어났다
- 미국 우표값 또 오른다…14일부터 73센트로
- 재외국민 휴대폰 ‘모바일 재외국민증’ 도입한다
- 부산·울산항~시애틀·타코마항 세계 첫 무탄소 운항
- 미 프로아이스하키 사상처음, 시애틀 여성 코치 선임
- 독립기념일인 내일부터 시애틀에 폭염 닥친다
- 시애틀지역 14살 소년이 음주운전, 경찰과 추격전
- 시애틀지역 내년도 재산세 많이 오를 것 같다
- "알래스카 빙하 80년대 보다 5배 빠르게 녹는중"
뉴스포커스
- 한동훈 "문자 논란, 당무개입이라고 생각…김건희 여사 결국 사과 안해"
- "외상의학 큰 타격…'기피 과' 될테고 둔감해질까 두려워"
- 유승민, 읽씹 논란에 "김건희, 왜 한동훈 허락받나…본인이 사과하면 될 일"
- 서울역 인근서 고령 운전자 '인도 돌진' 2명 부상…'급발진 여부' 조사
- ‘또 돈다발’…울산 아파트 화단서 2500만원 추가 발견
- "민족은행이라더니"…농협인들 조선 총독 별장서 만찬 즐겼다
- 가스요금 8월부터 6.8% 인상, 전기요금은 언제 오를까
- '10만전자' 다시 오나…'52주 최고가' 삼성전자, 주가 향방은
- 삼청교육대에 보호감호까지 최장 40개월 구금…법원 "국가 배상해야"
- '읽씹 논란' 한동훈 "김여사, 사과 아닌 '사과 어렵다'고 문자"
- 정부 '해병대원 특검법' 접수…尹, 15일 내 재의요구권 행사 결정
- '김여사 읽씹' 의혹에 '총선책임' 공세 …한동훈 "왜 이 시점에"
- '효성 차남' 조현문 "상속재산 전액 사회 환원…경영권 관심 없어"
- '이재명 습격범' 1심 징역 15년…법원 "민주주의 파괴 시도"
- 민주, 이진숙 방통위원장 지명 '십자포화'…"10번이든 100번이든 탄핵"
- '밸류업 대장주' 타이틀 얻은 KB금융…시총 8위 '셀트리온'까지 제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