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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수필-염미숙] 서바이벌 게임
- 23-05-01
염미숙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서바이벌 게임
벽난로 옆에 책장이 있다. 오래 전 남편이 솜씨를 발휘한 것인데 거실의 나무 톤과 어울리지 않아 바꾸고 싶었다. 벽의 크기에 딱 맞는 책장을 인터넷에서 발견한 건 지난 주였다. 모양도 단정하고 앙증맞은 다리도 맘에 들었다. 새 책장이 도착하기 전에 옛 책장에서 책들을 모두 쏟아냈다. 새 책장의 용량이 더 적어서 정리가 필요했다. 다시 새 책장에 올라가 앉을 승자는 누가 될까?
먼저, 처분할 기회가 왔다고 여겨지는 책들을 모아 멀찍이 쌓았다. 그중 단연 일순위는 사전이었다.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이 두툼한 사전들을 내려다보며 도도한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내렸다. 한번은 가볼 만 해, 라고 말하는 어느 관광지같이 쓸쓸한 책도, 베스트셀러라는 말에 끌렸으나 실망한 책도 있었다. 다음은 오래 간직한 고전이지만, 지금의 나와는 너무 멀게 느껴져 이젠 그만 보내주고 싶은 책들이었다.
버릴 때 미련이 하나도 없는 경우, 헌 신짝 버리듯 한다지만 책을 버리는 일이란 그보다 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닌가. 글은 바로 그 사람이라는데. 혼잣말로 미안한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더 곤란한 것은 버릴지 말지를 결정할 수 없는 어정쩡한 책이었다. 그중에도 자꾸 만지작거리게 되는 것은 무언가를 배우기 위한 책과 여행안내서다. 얼마나 나를 설레게 했던 것들인가? 그들을 탈락자로 분류한다는 건 나이 들어가는 증거라는 걸 인정하기 싫었나 보다.
새 책장이 도착했다. 승자가 다 결정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엄마, 그래도 이건 고전인데…. 너그러운 큰딸이 탈락자 중 몇 권을 구제해서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못 이기는 척 끼워주었다. 이번엔 남편이 거들었다. 아니, 이 사전들 다 버릴 거야? 손때 묻혀가며 공부하던 시절 닳아빠진 사전은 미래를 향한 희망이 아니었던가. 남편은 저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또 한 권을 집었다. 갑자기 등장한 심사위원들의 마지막 구제 카드로 건져진 책들이 휴, 땀을 닦으며 다시 책장 위로 올라갔다.
정리가 다 되어가는 마당에 이번엔 저만치 섰던 작은 딸이 말했다. 엄마, 책장에 화분을 놓아보세요. 엥? 아니 책장에 웬 화분이야? 하는 남편의 말에, 요즘 인테리어랍니다. 하고 딸의 말을 따라 보기로 했다. 가운데 칸을 비워 다른 칸에 책들을 밀어 넣었다. 심사위원의 낙하산, 통통한 초록 잎들을 매단 다육 화분이 엉뚱하게도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무엇으로 마음을 채우는가에서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보이느냐로 끝났다. 막내 심사위원이 나타나 장르를 통째로 바꿔버린 이 게임은 마무리가 반전이다.
말끔한 책장에 승자들이 의젓하다. 다른 심사위원들이 거들긴 했지만, 그들을 승자로 만든 건 결국 내 엄지였다. 책장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간직하고 싶은 과거와 매일의 걸음이 향하는 방향과 그 걸음의 즐거움을 누리는 방식, 그리고 미래의 소망을 담고 있다. 나라는 사람의 정체가 말갛게 드러난다.
언젠가 내가 책을 쓰게 된다면 아무래도 저 다육 화분 자리가 좋겠지? 그 모습을 상상하다가 생각 하나가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내 책은 누군가의 책장에서 오래 살아남았으면…. 순간 나에게 화들짝 놀란다. 누군가의 분신인 책들을 매몰차게 탈락시켰던 내가 아닌가! 염치없는 생각을 털어내려 머리를 흔든다.
갑자기 몸의 조각들이 철컥철컥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움직인다. 나는 심사위원의 푹신한 가죽 의자에서 내려와 스툴에 엉덩이를 겨우 걸친 흔들리는 눈빛의 서바이벌 게임 참가자로 변신한다. 꿈을 꾸는 한, 게임은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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