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이한칠] 도긴개긴
- 21-04-20
이한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도긴개긴
‘여기 설까, 저기 설까.’
계산대마다 줄이 기다랗다. 마스크로 무장한 나는 가장 짧은 줄에 섰다. 매장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갈 요량이었다. 웬걸, 내 줄의 저 앞쪽에서 문제가 생겼다. 세월없이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나와 같은 순간에 옆줄에 섰던 이는 계산을 끝내고 일사천리로 사라졌다. 우스개로 여겼던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이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모두 한 라인에 서 있다가, 순서대로 빈 계산대로 가는 방식이 좋다. 앞사람 일로 일어나는 시간 낭비를 줄여 준다. 공평하게 서비스를 받는다. 상황 판단하려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우체국이나 관공서, 일부 큰 매장도 이런 방법을 운용한다. 공정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하다.
선착순(First come, first served), 먼저 온 사람에게 혜택을 준다. 마땅한 일이다. 흔히 무료공연 입장권이나 사은품 증정은 보통 도착순으로 주어진다. 지원서나 수강 신청도 때때로 그렇다. 내게 맞는 줄에 잘 서려면 선의의 경쟁도 따라온다. 새벽에 일어나는 토끼가 맑은 물을 먹듯이, 남보다 근면해야 호기를 얻는다.
블랙 프라이데이나 신형 기기가 출시될 때는 요란하다. 사람들은 새벽부터 진을 친다. 전날 밤에 텐트까지 동원하기도 한다. 진풍경이다. 선착순의 끝판왕은 한정 판매(Limited Edition)다. 희소성을 내세워 특이한 의미를 부여한다. 자동차를 비롯한 갖가지 상품들은 소비자가 혹할 만하다. 200개 한정 판매와 같은 광고 문구는 구매 충동을 부추긴다.
대신 줄 서주는 서비스 회사가 있다. 정해진 수량의 명품이나 유명 콘서트 티켓을 살 때 이용한다. 각종 민원 접수 줄이 긴 경우에도 원하는 이들이 있다.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은 대리 줄 서기(LineStanding)를 활용할 만하다.
간혹, 일찌거니 줄 선 사람보다 당당하게 앞서가는 이들이 있다. 이는 비리가 아니다. 새치기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기회다. 비즈니스석 탑승자는 일반 승객보다 먼저 비행기에 오른다. 디즈니랜드에서도 패스트 패스(Fast Pass) 소지자는 길게 늘어선 대기자 옆을 지나 무사통과한다. 공공 기관의 급행료(Expedited fee)는 미리 신청한 다른 이보다 신속하게 일 처리해 주는 대가다. 내놓고 시행하는 이런 제도를 누구도 탓하지 못한다.
나는 선착순에 집착하지 않는다. 웬만하면 줄 서기에 앞장서지 않는 편이다. 내게 이변이 생겼다. 워싱턴 주지사는 백신 접종 연령군을 65세 이상으로 낮추어 공지했다. 마침 컴퓨터 앞에 있던 나는 곧바로 온라인으로 접수했다. 생각지 않게, 접종 예약이 선착순 1순위가 되었다. 지난 1월, 65세 군에서 가장 먼저 백신을 맞은 나는 다른 이들의 접종이 늦어져 마음이 쓰였다. 만일 병원에서 줄을 서야 했다면, 다른 이 앞서려고 부지런을 피웠을 리 없다. 온라인 덕이었다.
이십 대 초, 폼나게 기른 장발을 바리캉으로 밀었다. 훈련복으로 갈아입은 사관후보생들의 모습은 엉성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청춘이었으니, 눈망울 속에 푸른 꿈이 그득했다. 그나저나 해군 장교 교육인데, 신사적이겠거니 했다. 그 희망 사항은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다.
‘연병장 끝 777함 돌아 선착순, 실시!’
엄청난 벌칙을 직감한 훈련생들이 경주마처럼 내달렸다. 후미는 재실시로 이어지는 기합을 받았다. 교관은 짬 날 때마다 우리들을 닦달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본성이 드러난다더니, 요령 피우는 친구가 나타났다. 그는 제 코스를 빼먹고, 선두 대열에 슬쩍 끼어들었다. 그런 행위가 나로서는 언감생심이었다. 남을 제치고 이익을 챙기려 하다니. 사심을 조장할 수도 있는 선착순의 허점을 보았다.
훈련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꿰고 있던 교관은 앞서 도착한 무리를 불러냈다. 득돌같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귀관들은 의리 없이 혼자 살 궁리만 했나! 연병장 스무 바퀴 구보, 실시!’ 선착순의 반전이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고소한 냄새가 내 코끝에 앉았다.
매장에서 내가 선 줄은 아직도 멈춰 있었다. 내 바로 앞사람은 재빨리 옆 계산대 줄로 옮겼다. 그는 의기양양했고, 나는 멍때렸다. 잠시 뒤, 내 줄이 꿈틀거렸다. 드디어 내 차례, 계산을 끝냈다. 옆줄로 간 이에게 눈이 갔다. 이럴 수가, 이번에는 그 줄이 멎었다. 길게 보면, 잘 선 줄도 잘못 선 줄도 도긴개긴인 것 같다. 그의 투덜거리는 눈빛을 뒤로하고, 나는 매장을 총총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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