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김학인] 2월 단상
- 23-02-20
김학인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고문)
2월 단상
소소리바람이 살 속을 파고든다. 겨울 창고에 아직 남은 것이 있었을까. 바람과 눈비를 동원해 마지막까지 공세를 벌이는 걸 보니. 계묘년 새해 인사가 오간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중순, 일 년 열두 달 중 가장 짧은 2월은 또 얼마나 빨리 지나갈까.
올 2월은 늘 끼고 있던 우리 명절 설날을 1월에 넘기고, 음력 정월 대보름만 남기고 있다. 경축일 하나 없는 가난하고 작은 달 2월. 추운 겨울과 따뜻한 봄을 잇기에 “징검다리 2월”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순우리말 이름은 “시샘달”이다. 잎샘추위와 꽃샘추위가 있는 겨울의 끝 달이라 붙여진 이름이겠지만 하필이면 “시샘달”이라니! 앞뒤의 옹근 달을 시샘하는 것도 아닐 텐데 심술궂은 느낌이 드는 게 어쩐지 마뜩잖다. 1월을 “해오름달”, 3월은 “물오름달”, 5월은 “푸른달”. 이처럼 예쁜 이름은 아니어도 2월을 ‘부럼달”로 부르면 어떨까. 전통적으로 정월 대보름 아침에 부스럼 예방과 튼튼한 치아를 위해 ‘부럼깨기’를 하지 않은가. 아니면 그날 먹는 보양식 오곡밥을 생각하는 “오곡달”은?
2월은 두세 날이 짧다고 특혜를 원하거나 월세의 삭감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얼굴을 들고 어깨를 활짝 편다. 매월 받는 월급이 2월이라고 해서 삭감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유롭고 기분 좋은 달이라고 즐기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랴. 당당한 2월이 주눅 드는 한 가지가 있으니 29일에 출생한 이들을 대할 때다. 친구의 아들은 2월 29일이 생일이다. 그는 4년에 한 번씩 생일을 맞는 것이 얼마나 억울했을까. 지혜로운 어머니가 음력으로 생일을 챙겨주는 덕분에 4년에 한 번은 1년에 두 번씩 생일 축하를 받게 되어 2월을 더 고마워하게 됐다.
올해 2023년 2월의 달력을 눈여겨보면 구성이 재미있다. 한 달 28일이 신기하게도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모두 4일씩 공평하게 배분된 것이다. 4라, 우리는 숫자 넷(4)을 꺼리는 경향이 있지만 그 편견에서 벗어날 기회가 될듯하다. 우리 삶 곳곳에는 의외로 4라는 수가 깊이 새겨 있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일 년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이 있고, 땅에는 ”동, 서, 남, 북” 4방이 기본방위다. 공간을 측정하는 방법은 길이, 넓이, 깊이, 높이의 네 가지다. 막힌 곳 없이 모든 방향으로 통하는 “사통팔달”이란 말도 있다. 계묘년, 토끼의 엽렵하고 큰 귀로 분별 있게 좋은 정보를 취한다면 막혔던 일이 풀리는 시원한 2월이 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2월은 내가 속한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가 탄생한 달이기도 하다. 16년 전, 겨울비가 내리는 2월 초, 글 쓰는 몇 사람이 뜻을 모아 이민의 땅 시애틀에 한글문학의 새로운 장을 꿈꾸며 필봉을 높이 들었다. 해외지부로서 세 번째다. 협회에는 해마다 숨어있던 작가 지망생들이 참여하여 마음껏 기량을 발휘함으로 시, 수필, 소설, 아동문학 분야에서까지 각종 문학상을 받는 쾌거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믿음직한 회원들을 떠올릴 때면 자랑스럽고 든든하다. 협회가 매해 발간하는 묵직한 <시애틀문학>은 본국의 어느 문예지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받는 해외지부로 우뚝 섰으니 앞장섰던 한 사람으로서 보람과 기쁨을 누린다.
2월이 내게 특히 의미 있는 이유가 또 있다. 젊은 연인들이 선물과 함께 사랑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발렌타인 데이”에 나는 예쁜 딸을 선물로 받았다. 둘째였다. 생일을 따로 챙길 것 없이 상점마다 하트가 둥둥 떠 있어 모두가 딸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분위기다. 그리고 이듬해 2월, 봄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끝자락에 큰 눈을 가진 막내아들이 우리 집의 새 식구가 되었다. 행복한 세 남매의 엄마, 나는 해마다 2월을 감사의 달로 새김질한다. 짧아서 아쉬운 2월은 나에겐 더없이 축복된 달이다.
생명이 약동하는 봄, 가슴 설레는 봄을 잉태한 2월이 만삭의 몸을 뒤척이며 기지개를 켠다. 뒤뜰 양지바른 곳에는 어느새 물오른 동백의 빨간 꽃봉오리들이 녹색 비단 잎을 딛고 몸을 풀기 시작한다.
나도 무거운 마음을 털어내고 봄맞이 채비하며 창문을 활짝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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