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키다리와 털북숭이
- 22-09-19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키다리와 털북숭이
개에게 먹일 물을 좀 달라며 키다리가 빈 그릇을 내밀었다. 밖에서는 브라우니와 그레이가 꼼짝도 하지 않고 제 주인만 바라보고 있다. 물그릇을 바닥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녀석들이 달려들었다. 갈증이 심했는지 물을 들이켜는 소리가 안에까지 요란하게 들린다.
그러기를 몇 차례, 처음엔 키다리가 누굴 기다린다고 하면서 가게 앞에 앉아 있더니 점점 그 시간이 늘어났다. 손님 중에는 눈살을 찌푸리는 이도 있었지만, 그에게 다가가 돈이나 먹을 것을 건네주는 이도 더러 있었다. 그러자 키다리는 차츰 문 앞에까지 와서 대놓고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몇 번 주의를 주었지만, 그때뿐 우리가 없는 틈을 타서 가게 앞에 앉아 있곤 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마침 화단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 반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키다리에게 잡초를 뽑으라고 일거리를 주었더니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다. 잡초를 뽑는 키다리의 헐렁한 바지 허리춤 아래로 엉덩이가 반쯤 드러나 보였다. 그래도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활기차게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이 오히려 보기 좋았다. 덕분에 주변의 잡초가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나름 잘한 일이라고, 좋은 생각이었다고 식구들 앞에서 우쭐대기까지 했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키다리가 이른 아침부터 나타났다. 주방에서 일하는 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하더니만, 눈 깜짝할 사이에 서랍 속에 든 돈지갑을 훔쳐 가고 말았다. CCTV에 녹화된 그의 행동에 말문이 막혔다. 그의 웃음 뒤에 가려진 흉측한 계략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키다리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내가 너무 순진했었나. 누구처럼 처음부터 경찰을 불러서 아예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게 옳았을까. 땀 흘리며 잡초를 뽑다가 나를 보고 웃는 그에게 마음을 좀 기울이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부서진 마음 조각들을 쓸어 모아 다잡으며 단단해지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키다리가 훔쳐 간 것은 돈지갑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또, 밤새 키다리가 나타나 주차장 옆 잔디밭에 난장판을 벌여 놓았다. 찌그러진 맥주 캔과 쓰레기가 마구 흩어져 있고, 나뭇가지 사이에 종이 박스가 축 늘어져 걸려 있다. 키다리는 어디로 사라졌고 비에 젖은 침낭 안에 개들만 나란히 누워 있다. 기척을 느낀 녀석들이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다리 사이로 꼬리를 숨긴다. 여기가 저희 머물 곳이 아니라는 걸 아는지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건물 가까이에서 불을 피웠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간신히 잡아놓은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듯 가슴에서 불이 확 치솟는다. 경찰이 왔다 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신고를 해야 하나.
키다리를 볼 때마다 안에선 갈등이 일었다. 때로 그를 못 본 체하고 다녔던 것은 음식을 받아 들고 행복해하는 홈리스들의 얼굴과 그의 얼굴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따뜻한 밥 한 그릇에 마음을 담고 웃음을 얹어 건네주면, 그들도 환하게 웃으며 맛있게 먹었다. 덥수룩하던 머리가 단정해지는 게 보고 싶어서 한동안 이발사 노릇도 즐겁게 했다. 냄새에 유난히 민감했지만 신기하게도 그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함께 정을 키우며 작은 기쁨도 크게 나누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한 홈리스 사역에 대해 회의가 들 때도 있었으나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시간만큼은 진심으로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곳은 밋밋한 내 삶 가운데 불쑥불쑥 나타난 물음표들이 확실한 느낌표로 뿌리를 내리는 특별한 자리였으니까.
키다리가 휘저어놓은 속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마음이 힘들지만 언제까지 키다리 타령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키다리는 그저 자기가 살아왔던 방식대로 순간순간 살아갈 뿐이다. 어리석은 내가 키다리에게 괜한 기대를 했다가 인제 와서 배신감 운운하며 가슴앓이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누구를 탓하랴.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나서야 삶의 한 페이지를 힘겹게 넘긴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또 괜찮아질 것이고, 키다리는 머잖아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 테니까.
키다리가 떠나고 없는 자리가 허전하리만큼 깨끗하다. 어스름 녘에 가게를 나서는데 웬 노랫소리가 들린다. 주차장 입구에서 낯선 털북숭이가 빈 가스통을 발 앞에 두고 기타를 치며 외치듯 노랠 불러댄다. 길에는 차도 뜸하고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은 굵어지는데, 어쩌자고 털북숭이는 이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그냥 지나치려다가 그 앞에 멈춰 섰다. 건너편으로 가, 여긴 위험해.
내 소리는 빗속에서 흔들리고, 털북숭이의 노랫소리는 차가운 비에 젖어 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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