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안문자] 어머니와 양배추
- 22-07-25
안문자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어머니와 양배추
동글동글 양배추가 쌓여 있다. 다듬지 않은 녹색 거친 겉잎에 눈길이 머문다. 아, 양배추 겉잎! 한 개를 집어 든 손에 정겨움이 묻어온다. 그 옛날 양은그릇에 담아 밥상에 올린 양배춧국이 민망해 엷은 미소를 띤 젊은 엄마. 웃음 가득한 아버지의 얼굴도 겹쳐 보인다.
어린 시절 우리 6남매는 한 작은 교회 사택에서 살았다. 가끔 친척이 한두 사람이 얹혀살기도 했다. 가난한 살림에 끼니때마다 어머니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계속 모자라는 찬거리를 감당할 수 없었던 어머니, 하루는 시장의 어느 채소 가게에서 다듬고 버린 시퍼렇고 뻣뻣한 양배추 겉잎을 몽땅 모아왔다.
사택에서 살 때라 늘 교인들이 드나들기 때문에 이불 솜만 한 보퉁이를 마루 구석에 감추어 두었다. 한데, 이를 어쩌나! 권사님 한 분이 ‘사모님 계세요?’하며 들어오시는 게 아닌 가? 엄마의 얼굴이 빨개지며 보퉁이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아니 사모님, 이게 뭐유? 혼자서 몰래 잡수려고 감추어 놓으셨어요?’하며 꾸러미를 들쳐본다. 당황한 권사님은 ‘아이고, 사모님…애쓰시우.’ 하다가 얼른 딴청을 한다. 창피함은 권사님으로 끝났고, 한 동안 간이 잘 밴 양배추김치와 멸치가 둥둥 떠 있는 국은 얼마나 맛이 있었던가.
얼마 후 언니와 나는 결혼을 했고, 부모님과 동생들은 미국에 이민했다. 양배추의 비밀을 혼자 간직하던 그 권사님은 할머니가 됐고 위암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니와 내가 병문안을 갔더니 수척해진 몸이지만 옛날이야기로 생기가 돈다. 양배추 쌈이 있는 밥상이 들어왔다. 감추어 두었던 양배추 겉잎 사연이 떠오른 건 당연하다.
그 당시 부모와 동생들이 그리워 툭하면 눈물이 나던 때다. 참지 못한 권사님은 이불보따리 이야기를 꺼내신다. 깔깔대며 웃다가… 언니와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뿌옇게 가려진 밥상을 내려 보다가 울고 말았다. 놀란 권사님은 그렇게 고생하셨지만, 지금은 미국에서 자녀들의 효도를 받으며 얼마나 행복하냐? 재미있자고 한 말인데, 라며 쩔쩔맸고, 잠시 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트에서 사 온 양배추 한 덩어리를 식탁에 올려놓고 서늘해진 가슴을 달래다가 양배추의 진가가 궁금해졌다. 어머니의 사랑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그래도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본다. 비타민A, B1, B2, C, E, U, 칼슘, 철분, 아미노산… 풍부한 영양소가 놀랍다. 소화에도 좋고, 위염, 위궤양, 위암도 예방한다고. 매일 양배추즙을 한 잔씩 먹으면 위병은 물론 다이어트, 피부미용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니 얼마나 좋은 채소인가?
오랜 세월이 흘러 미국에 다 모인 자리에서 어머니가 이불보따리 사건을 잊은 듯 양배추 선전에 열을 올린다. ‘거 왜 아무개 권사님 말이다. 손자가 위병이 나서 밥을 잘 못 먹었잖니. 매일같이 양배추 즙을 만들어 먹였다는구나, 손자가 안 먹으니까 울면서 먹였어. 그 정성으로 위병이 다 나아 밥을 잘 먹는대. 너희들도 살짝 삶아서 쌈으로도 먹고… 양배추, 많이 먹어라.’양배추 겉잎 가득한 이불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어색하면서도 기뻐하던 젊은 날의 어머니 모습이 어른거린다.
자식들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창피를 무릅쓰고 그런 용기를 냈을까. 효능이 무슨 문제랴. 양배추 겉잎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과 손맛 때문에 멸치가 없어도 억센 양배추는 누그러졌고 국은 달았다. 그 사랑을 먹고 자라던 올망졸망 우리는 배고픔을 몰랐다. 반찬이 없는 날엔 더 유난스레 ‘와, 맛있다. 정말 맛있구나.’분위기를 붕 뜨게 만들었던 아버지의 능청도 한 몫 했었지.
가난했지만 부드럽게 풀어진 양배추 잎처럼 서로 어울려 달작 지근한 사랑으로 우린 행복하게 자랐다. 가족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젊은 엄마의 깊은 사랑은 세월이 가도 변함이 없었기에 우리, 육남매는 오늘도 시애틀에서 건강하게 늙어간다. 그 자양분이 우리들의 후손들에게도 아낌없이 흘러들기를 바라면서.
겉잎이 퍼런 양배추를 바라보며 새삼 깨닫는다. 가난한 밥상에도 사랑이란 단맛이 보태지면 아이들은 밝게 자란다는 것, 또한 사랑을 먹고 성장하면 고인 그 사랑으로 내 가족 내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웃음꽃 속에 희망이 싹트고, 어제의 사소한 기쁨들이 오늘의 감사가 되었다. 비록 양배추의 얼룩진 녹색 겉잎으로 차린 밥상이었지만 불만 없이 즐겨 먹은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머니, 그 사랑 속에 행복했던 우리의 경험은, 작은 천국과 무엇이 다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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