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공순해] 바람개비
- 21-03-22
공순해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바람개비
대통령이 연단에 오른다. 박수가 물결치며 미디어들의 카메라가 일제히 그에게 집중된다. 그는 상례대로 상원 의장인 부통령과 초대자인 하원 의장에게 연례 국정 연설 원고 사본을 전한다. 원고를 받은 초대자는 답례로 악수를 위해 손을 내민다. 하지만 대통령은 트레이드마크 미소와 함께 그냥 단으로 직진한다. 순간 장내(場內)는 칼을 삼킨 듯 숨죽인다.
이날 국정 연설은 우크라이나 스캔들과 관련,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상원의 탄핵 유무죄 최종 표결을 하루 앞둔 상황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그는 약 80분간의 연설 내내 탄핵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 대신 본인의 스타일 대로 자신의 치적을 한껏 내세웠다. 일자리 창출과 낮은 실업률, 중국과의 무역 합의 등에 대해서만 말했다. 탄핵에 관한 변명보다 치적을 내세워 지지층 결집과 함께 재선에 골인하겠다는 전략으로 보였다.
이에 늘 보던 대로 공화당 의원들은 수시로 기립해 함성과 박수로 화답했고, 민주당 의원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날엔 그뿐이 아니었다. 연설이 끝나고, 의외의 장면이 돌출됐다.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이 대통령 연설 원고를 부욱 찢어, 보란 듯이 언론 카메라를 향해 흔들어 보이고, 책상으로 내던졌다. 대통령은 무반응으로 연단을 내려갔다. 이로써 가장 유명한 남성과 여성이 한 수씩 주고받은 셈, 의례적(儀禮的)인 국회 행사가 이례적(異例的)으로 끝났다.
펠로시의 도발적인 행위에 민주당 지지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의 격한 반응이 쏟아졌다. 트럼프에게 불만이었던 사람들도 박수로 환영했다. 통쾌했다는 반응이었다. 이 쾌거로 그녀는 일단 순풍을 탄 듯 보였다.
그러나 바람은 늘 우호적이지 않다. 그후 그녀는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따라 영업이 허용되지 않은 샌프란시스코 단골 미용실을 ‘노 마스크’상태로 방문했다. 동영상의 세상인지라 그 장면은 곧 영상으로 전파됐고 그녀는 방역 수칙상 공공의 적이 됐다. 그녀는 이 일을 미용실이 파놓은 함정 때문이라 항변했고 미용실 주인은 이를 정면 반박하고 나섰다. 또한 일부 미용실 주인들도 그녀 자택 앞에서 그녀가 위선적이라며 항의 시위를 펼쳤다. 점입가경은 이 미용실 주인을 돕기 위해 공화당 지지자들이 온라인 모금 사이트 ‘고펀드미’에 해당 미용실 돕기 계정을 만들었고, 이틀 동안 14만 달러의 성금을 모았단 점이다. 마스크 착용 여부의 본질적인 문제에서 떠나 이 문제는 정치 세계로 진입됐다.
이 시점에서 이 논란이 어디서 많이 본 듯, 기시감이 드는 이유는 뭘까. 본질이 호도돼 정치화하고 그게 이어 사회화되어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다 나라까지 뒤엎는 국가를 조국으로 둔 탓일까. 본질이 왜곡, 도구화돼 인간의 이기심에 편승하여 권력과 부의 어깨에 안착하고 마는 꼴을 그간 수도 없이 봐 왔기에 끝없는 피로감이 몰려왔다.
때는 방장(方壯)하여 대선의 해, 양쪽 모두에게 이런 호재가 어디 있겠나. 펠로시의 함정 발언 이후, 미용실을 불태우겠다는 증오의 문자 메시지와 살해 협박으로 상황은 공화당의 편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낸시가 누군가. 화장발로 해 언론 샷으로 놓치기 쉽지만 팔순 넘은 노련한 정치가다. 트럼프보다도 6살이나 더 많다. 늦은 47살에 정계에 입문했으나 지금은 수십 년간의 정계 생활로 잔뼈가 굵은 노회한 거물 정치인이며,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른 여성 정치인이다.
미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성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등원했을 때 그녀들을 위한 화장실조차 없었다고 한다. 외로운 바람개비처럼 꿋꿋이 열악한 환경과 싸워서 오늘의 여성들 입지를 다져온 그녀들 중의 한 명이기에 그녀는 충분히 싸움을 역전시킬 역량이 있다.
바람개비는 스스로 돌지 못한다. 바람의 방향을 타야 돌아간다. 정치인들 또한 혼자 뜻을 이루지 못한다. 대중의 힘을 얻어야 가능하다. 그들의 바람개비는 분노의 방향이란 바람을 타면 더욱 잘 돌아간다.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두는 사람들이다. 비록 선거에서 트럼프가 패했지만 그의 바람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민생을 위해 정치가 있어야 하건만 정치를 위해 민생을 활용(?)하는 자들로 넘쳐나는 세상. 백인들의 분노와 소수의 분노가 일으키는 충돌 사이에서 승자 바이든은 기막힌 곡예 기술을 보여줄 수 있을까.
왜 사냐 건 웃지요, 차원의 시대는 갔다. 오늘의 정치는 각자의 마당에 떨어진 산불과도 같다. 정치 사유화에 매몰된 파렴치범들을 방관할 것인가, 분노의 방향에 부채질하는 무리에게 일 점 분노라도 표명해야 할 것인가, 뭐라도 해야만 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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