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안문자] 집 떠나는 젊은이들
- 22-02-07
안문자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집 떠나는 젊은이들
내게는 외모와 재능을 겸비한 조카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귀하고 자랑할 만하다. 아들과 딸에 대한 자랑은 첫째가는 바보이고, 손자 손녀 자랑은 ‘돈 줄게 하지 마’에 ‘돈 내고 할 거야’한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그런데 조카 자랑엔 짓궂게 딴지거는 말이 없는 걸 보면 한 치 건넌 조카들 자랑은 별로 안하는 모양이다. 역경을 딛고 성공한 어느 분의 책을 읽었는데 수재 아들들이라곤 하나 너무 자랑이 많아 좀 민망했다. 그러니 조카들에 대해서는 마음 놓고 자랑한들 누가 뭐랄까?
흐르는 세월을 타고 아이들은 성큼 자랐다. 귀엽던 꼬맹이들은 강산이 몇 번 바뀌자 어른들이 되어버렸다. 가까이 사는 형제들은 너나없이 빈 둥지를 지키며 늙어간다. 운이 좋아 시애틀에 모여 사는 우리 아이들과 조카들은 사이좋게 자랐고 즐거운 추억도 많다. 하지만, 이젠 동부 서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미국의 훌륭한 교육을 마치고 자신들의 삶에 충실히 살아간다. 우리 집 아이들이 떠날 때 슬프고 섭섭했는데 조카들이라고 그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성탄에, 동생 네가 10년 만에 얻은 외동딸 조카가 약혼자를 동반하고 왔다. 때마침 성탄 축하 장식들이 색색으로 반짝이며 그들의 사랑을 기뻐하고 환영하는 듯했다. 기대한대로 늠름하게 잘 자란 멋스러운 청년이 순박하고도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나이 든 고모, 삼촌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풋풋한 젊은이들의 사랑은 축복이요, 희망이다. 세상의 그 무엇이 사랑하는 젊은 한 쌍의 아름다움과 견줄 수 있을까. 바라만 보아도 정겹고 흐뭇하고 감사하다.
십여 년 전, 이 조카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 진학을 위해 먼 길을 떠날 때 가족들이 모여 송별예배를 드린 일이 떠오른다. 아, 그때는 우리 어머니가 계셨지. 어머니는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을 타주로 떠나보내며 서운해하는 아들 며느리에게 말했다.
“그저, 아이들 대학에 간다고 나가는 것, 초벌 시집, 장가보낸다고 생각해라. 한 번 나가면 이젠 같이 살 생각 하지마라. 아이들 안 온단다. 게서 취직하고 결혼도 하지. 내가 너희들 키우며 겪었던 섭섭함이 이젠 너희들 차례구나. 비행장에 내려주고 집에 와서는 앙앙 울곤 했어.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더구나. 그러노라면 그들의 소식을 기다리며 다시 살 만하게 된단다.”
나는 이미 아이들을 떠나보낸 후라 어머니의 말을 절감하고 있었다.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그때의 동생 부부에게 어머니의 체험을 통한 경고(?)가 얼마나 매몰차게 들렸을까?
송별 식사를 나누고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 사람들을 잘 사귀며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 따뜻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돼라.'고 간절히 기도하던 고모부의 떨리는 목소리에 둘러앉은 가족들도 울컥했다. 자식을 멀리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다 같으리라.
예배를 마치고 삶을 에워싼 은혜에 잠겨있는데, 느닷없이 할머니가 크게 말했다. “진선아! 학교에 갈 땐 밉게 하고 가거라!” 조카의 눈이 동그래지고 우린 모두 어리둥절했다. 그 당시 주니어 틴으로 최고의 크라운을 썼던 예쁜 손녀딸이 걱정스러운 할머니의 기발한 충언이다. 누군가 할머니를 거들었다. “그래그래, 진선아, 아주 밉게 꾸미고 다녀라! 하하하.” 눈치 챈 어른들의 박장대소로 울먹이던 먹구름은 사라지고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할머니가 계셨다면 이 행복한 젊은이들에게 어떤 유머 섞인 타이름으로 또 웃기셨을까…
여름에 그들이 결혼을 한다. 흩어진 자녀들과 만나는 기쁨을 꿈꾼다. 이젠 누가 결혼을 해야 다 모이는 경험을 몇 차례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이미 오래 전 우리의 품을 떠난 아이들 그리움이 벅차오른다. ‘행복할 때 감사하고, 힘들 때 기도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이 되어라.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능력대로 주신 몫을 잘 감당하거라.’떠나는 아이들을 위한 나의 기도였다.
세상은 여전히 어지럽고 스산하다. 펜데믹에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까지 겪고 있다. 인도에서는 수십 년 만에 눈 덮인 히말라야가 보인다는 신기한 소식이 있지만 우리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어느 역사학자는 말했다. '폭풍은 사라지고 남은 자들은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나는 이 희망을 믿는다.’라고.
어떠한 변화가 와도 우리는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을 신뢰하고 그 날개 아래 살아갈 것이다. 아침 햇살엔 눈이 부시고 철마다 정원엔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자연의 질서는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서재엔 책이 늘어가고 젊은이들은 서로 사랑할 것이다. 나는 또 믿는다. 결국엔 최선을 다하는 선한 사람들이 세상을 이길 것임을.
우리는 하나님 사랑의 손 안에서 맡겨진 일에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다. 늙어가는 부모, 고모, 삼촌들이 지켜온 이 소중한 믿음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 쌍의 연인과 집을 떠난 우리의 젊은 세대에게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이러질 것을 간절히 바라며 두 손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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