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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5-26 11:47
[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징검다리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506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징검다리

탄천(炭川)에 내리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거대한 은빛 물고기가 수면에 그려진다. 물살을 거슬러가는 은비늘의 황홀한 움직임에 넋을 잃고 바라본다. 물고기를 좇아가다 잠시 벚꽃 길에 눈길을 주는 동안 물고기가 사라져버렸다. 지나가던 구름이 저 닮은 새끼 구름 몇 개쯤 물 위에 그리고 싶었나 보다.

손을 잡고 징검다리를 건너는 노부부의 어깨에 꽃향기가 그윽하다. 건너편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햇살을 타고 멀리 퍼져간다. ‘곤드레돌솥밥이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맛도 모양도 궁금한 밥을 먹어보려면 개천을 건너야 한다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아치형의 멋진 다리보다는 졸졸졸 물소리가 들리는 징검다리를 건너고 싶다. 문을 나서자마자 저만치 앞질러 가던 마음이 벌써 징검다리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개천의 물이 맑다. 송사리 떼가 징검돌 사이로 몰려다니며 놀이에 한창이다. 어린아이처럼 팔짝 뛰어 첫발을 내딛는다. 마음은 어린 시절로 훌쩍 돌아가려는데, 세찬 물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던 것과는 달리 개천의 폭이 상당히 넓고 물살도 빠르다. 은근히 겁이 나며 가벼운 어지러움마저 인다. 조심조심 걸음을 옮긴다.

징검다리 가운데쯤, 벚꽃 잎이 하나 둘 날아와 가슴에 안긴다. 징검돌을 감싸 안고 흐르던 물이 내 안으로 흘러드는 것 같다. 아득한 기억 속의 노래가 입에서 절로 흘러나온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 험한 세상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던 때, 팝송이 좋고 사이먼과 가펑클의 목소리가 좋아 그냥 따라 불렀던 곡이다. 세월의 강을 건너면서 작은 위로가 되어주곤 했던 노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던 그 노래를 징검다리 건너며 다시 불러본다.

햇볕에 검게 그을린 징검돌이 등을 내주고 있다. 첫발을 내디딜 때부터 나를 거뜬히 받아내는 녀석이 마음에 들었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을까. 영원한 안식처인 줄 알았던 바위산에서 갑자기 뿌리가 뽑히던 순간, 녀석은 소리조차 지를 수 없는 아픔을 삼켜야 했을 것이다

이토록 탄탄한 등이 만들어지기까지 뼈가 부서지고 깎이는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물속에 제 뿌리를 내리기 위해 처절한 절망과 싸워야 했을 많은 날들을 헤아려 본다. 울음조차 잊어버린 긴 시간을 삭혀온 침묵의 언어가 그의 옆구리에 결을 이루고 있다.

징검돌 덕에 무사히 물을 건넜다. 뒤를 돌아본다. 내가 건너온 시간들 곳곳에도 크고 작은 돌들이 제 등을 내민 채 엎드려 있다. 종종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돌을 탓하며 모든 돌은 걸림돌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그 돌들이 고맙다. 걸림돌이 아니라 나를 이끌어준 고마운 존재로 보인다. 때론 징검돌이 되고 때론 디딤돌이 되어준 저들이 있었기에 세파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게다.

그땐 몰랐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너려면 험한 물살을 견딜 만한 무게의 짐을 지고 가야 한다는 것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주저앉을 것만 같았던 순간도 있었다. 그래도 힘겹게 건너고 나면 좀더 단단하게 여문 내가 보이곤 했다

그러면서 삶의 곳곳에 굳은살이 배고 근육도 조금씩 늘어난 것 같다. 지금껏 겪은 크고 작은 어려움은 어쩌면 누구에겐가 내줄 든든한 등을 키워가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만큼 살아보니 알겠다. 한 순간이라도 내 무릎을 땅에 대고 남에게 등을 내주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따끈한 돌솥 밥에 속이 든든하다. 구수한 곤드레 나물 맛에 등에서 일던 헛헛한 기운이 꼬리를 감춘다. 다시 징검다리 앞에 선다. 물고기가 나타나 지느러미를 반짝이며 유영을 시작한다. 햇살이 낳은 저 물고기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태양이 솟아오르는 바다 어디 쯤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은빛의 큰 무리로 다시 태어나길 바란다.

햇살이 징검돌의 등을 쓰다듬고 있다. 부끄러운 나의 등에도 볕이 머물고 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지나야 내게도 징검돌 같은 등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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