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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25 12:50
[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목욕시키기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1,708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목욕시키기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딸을 조금이라도 도와주고자 가만가만 아기 목욕물을 준비한다. 따뜻한 물에 발을 첨벙거려주자 아기가 방긋거리며 눈을 맞춘다. 아직 목도 가누지 못하는 갓난아기가 할미를 알아볼 리 없건만, 짝사랑에 빠진 할미는 그렇게 믿고 싶다

고맙게도 할미의 손길을 잘 받아들인다. 올이 고운 수건으로 얼굴을 꼼꼼히 닦고 머리를 감기는 동안 조용히 안겨 있다. 도우미로 나선 그이의 손이 심심할 정도로 아기는 목욕을 즐기고 있다.

우리 아이들도 목욕을 좋아했다. 사실 욕조 안에 들어가 셋이서 물장난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한꺼번에 씻기고 나면, 온몸이 땀에 젖고 지쳐서 꼼짝하기도 힘들었다

구석에 쌓인 산더미 같은 빨랫감은 나를 더 지치게 했다. 빨래는 세탁기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나를 씻겨줄 수 있는 손은 아무 데도 없었다. 요술 램프가 떠올랐다. 램프에서 거인이 나와서 나를 번쩍 안아들고 아기처럼 씻겨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거인은커녕 요술 램프도 구경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에는 그저 빗물처럼 내리는 샤워기 아래 서서 몸도 마음도 씻으며 살아야 했다.

어느 해 어머니 날 스파 이용권을 선물로 받았다. 찜질방, 스파, 때밀이, 사우나.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것들은 나와 거리가 먼 낯선 단어에 불과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카드가 생기면 곧장 달려가곤 한다. 그곳에 가면 몸을 씻어주는 세신사(洗身士)가 있다

그녀의 손길에 나를 맡기고 있으면, 마치 아기처럼 안겨서 목욕하는 기분이 든다. 굳어 있던 근육들이 풀리고 마음까지도 나른해져서 저절로 눈이 감긴다.

. 한 방울 액체가 팔에 똑 떨어진다.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과는 다른 느낌이다. 힘을 다해 바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땀이다. 삶이 녹아든 땀방울에서 체온이 느껴진다. 아픈 어깨를 살살 달래가며 씻어주는 손길에 정성이 배어 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젖히며 활짝 웃는 그녀가 와락 마음에 와 닿는다. 자신의 땀방울을 비누 삼아 다른 이의 마음까지도 씻어주는 손길이 참 귀하다. 

아이들이 스스로 제 몸을 씻을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이 씻기고, 또 나를 씻었는지 모른다. 목욕을 시키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면서, 피부에 작은 티라도 보이면 연고를 바르고 호들갑을 떨곤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생긴 크고 작은 얼룩에는 미처 생각이 닿지 못했다

나의 부주의한 말과 행동으로 인해 가족들의 마음이 얼룩진 날이 더러 있었다. 정직한 사과와 위로보다는 가족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며 슬그머니 지나쳐버릴 때가 더 많았다.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얼룩을 제때 지워주지 못하면 묵은 때가 되는 것을 왜 몰랐을까.

지금도 문제다. 버리고 비우겠노라 다짐하지만, 색깔과 모양만 다를 뿐 욕심과 아집이 늘 똬리를 틀고 있는 마음은 어떤가. 하나를 버렸다 싶으면 어느새 다른 것이 자리를 잡아 매일 복작거린다. 구석구석에 끼어든 때를 말끔히 씻어야 한다. 그런데 때가 잘 보이지 않는다. 놈은 곳곳에 포복하듯이 숨어서 나를 오히려 염탐하는 것 같다.

작은 목욕 대야에 담긴 물이 뽀얗다. 때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은, 아기의 몸을 감싸고 있던 고운 피지가 뽀얗게 떠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이다. 마음을 쏟아 다시 한 번 가볍게 씻어준다. 맑은 물로 가셔주면 목욕이 끝난다. 물이 아기의 등에 귀여움, 사랑 같은 말을  새기며 흘러내린다. 그이는 잽싸게 수건을 펼쳐 들고 아기를 감싸 안는다

어이쿠,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던 그이가 껄껄 웃는다. 아기가 쉬를 하고 있다. 포물선을 그리며 얼굴에 와닿는 따뜻한 물총이 아기와 나를 이어준다. 아기의 마음이 담긴 특별한 작별인사를 할미의 마음에 꼭 간직한다. 

하얀 수건에 싸인 아기의 볼이 향기로운 꽃잎 같다. 딸도 이 향기를 맡으며 엄마의 길을 행복하게 걸어갈 것이다.

언제쯤 또 목욕을 시킬 수 있을까. 다음에 만날 때면 더 여문 꽃을 볼에 피우며 할미와 눈을 마주치겠지. 그때쯤이면 이 할미도 지금보다는 나아진 모습으로 아이의 눈동자에 비친 나를 찾아보리라 다짐한다.

순한 향이 가슴에 가득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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